첫 마음이 부처의 마음

                                                        정찬주(소설가)

늦잠을 잤다. 보름달이 숨 가쁘게 지고 있다. 밤새 나를 외호했을 것 같은 보름달이다. 쌍봉사 신도분들은 오늘 여수로 방생하러 간다고 한다. 경내의 불빛이 군데군데  환하다.  

어제 서울에서 내려온 불광출판사 미디어팀 분들이 오후 2시부터 7시 30분까지 긴 인터뷰를 했다. 질문지 없는 즉문즉설 형식이었다. 

때로는 웃고, 가끔 진지한 얘기를 주고받는 자리였다. 첫 번째 인터뷰 주제는 곧 출간할 <아쇼까대왕>(전3권)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였고, 두 번째 인터뷰 주제는 15번을 다녀온 나의 인도 여행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물론 촬영도 겸했다. 편집해서 유튜브로도 띄울 예정이라고 한다. 질문지 없이 한 인터뷰여서 좀 산만하지 않을까 싶다. 반면에 포장되지 않은 내가 그대로 보여지므로 진솔한 구석도 있을 것 같다.

인터뷰 중에 안성에서 치과병원을 하시는 김대기 원장님과 그분의 큰딸이 불쑥 방문하여 세 잔의 차만 마시는 약식 차담을 했다. 나의 장편소설 <다산의 사랑>을 애독한 소중한 독자분이기 때문에 돌려보낼 수 없었다. 

주로 얘기를 듣는 청자(聽者)의 입장만 견지해오다가, 몇 시간을 쉬지 않고 계속 얘기하는  화자(話者)가 되었더니 몹시 피곤했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새벽 6시 30분인 것이다. 수 년 만에 처음으로 늦잠을 잔 셈이다. 어젯밤 캄캄한 시간에 떠난 두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다음 인터뷰 상대는 상주에 계시는 법상 스님이라고 했던 것이다. 회사 일로 분주하게 다니겠지만 사람들은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듯 끊임없이 인연의 삶을 일궈 나가고 있다. 각자 자신만의 무늬를 수놓듯 살아가고 있다. 정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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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4시쯤 광주 보은사 도제 주지스님께서 신도 분들과 함께 이불재를 방문했다. 뜻밖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도제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던 것이다. 이처럼 군더더기 없이 통고하는 방식도 스님의 문법이리라.

도제 주지스님과 나는 깊은 인연이 있다. 십수 년 전 스님께서 원각사에 계실 때 법당에서 강연을 했고, 이후 수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님과 종종 전화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스님께서 출가한 사연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청년 시절에 출가할 마음이 사무치어 추석날 송광사 일주문을 들어섰던 것이다. 서울역에 갔을 때 순천 가는 열차표가 매진되어 암표를 샀다고도 스님은 내게 고백했었다. 첫 마음이 부처의 마음(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사연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니 그 출가 의지가 그대로인 것 같아 더 반가웠다.

아마도 명절날 출가한 분은 도제 스님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유일무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석 날 출가했던 그 의지라면 무엇이건 간에 이루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나는 신도분들에게 스님의 출가 사연을 들려주었고, 스님께는 잊지 마시라고 상기시켜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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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30분부터 5시까지 쌍봉사 주지스님과 차담을 했고, 저녁에는 심안(心眼) 나상규 선생과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다.

보이차는 숙성시키지 않은 청병을 우렸는데, 스님은 기운이 강하다고 평했다. 나중에는 단맛이 나는 게 특이했다. 이렇게 대화에 집중하면서도 차 맛을 살피는 것도 마음챙김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수행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사랑하고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 태도가 아닐까. 나는 깨달음 지상주의를 경계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깨달음을 얻어 가는 과정, 즉 삶의 충만한 순간이 중요한 것이지 깨달음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심안을 배웅하면서 보이는 소나무와 소나무 그림자가 내게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환(幻) 같은 그 아름다움도 포획하듯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면 나는 순간순간 고마운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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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의사 베흐너 박사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서 듣고는 놀랐다. 베 박사님의 부인 IMK 권회장님이 아내에게 1월 13일 돌아가셨다고 문자를 보내온 것이다. 이미 장례를 치르시고 마음을 추스린 뒤 한국에 있는 우리에게도 알린 듯하다. 

나와 아내는 오스트리아를 두 번 갔다. 처음에는 내 책 애독자인 권회장님 초대로 2015년 9월에, 두 번째는 2018년 5월에 이탈리아에서 15일 보내고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넘어갔던 것이다.

나는 베흐너 박사님이 한국 노래를 안다고 해서 인기가수 나훈아가 연상되는 배훈아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후 권회장님이나 우리 가족은 '배박사님'이라고 불렀다.

배박사님은 처음부터 나와 아내에게 몹시 호의적이었다. 아내가 비엔나에서 도예전을 하는데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고, 알프스 산자락의 전원도시 몬타폰에 살고 있는 작곡가 헤르베르트 빌리 씨를 만나러 갈 때 권회장님과 교대해가며 7시간 동안 승용차 운전을 해주셨던 것이다. 

3일 뒤 몬타폰에서 돌아와서는 내가 네 발 달린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자, 슈퍼마켓에서 칠면조 고기를 사와 두 발 달린 것이니 안심하라고 웃으며 조크 하셨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두 번째는 도나우 강변 크렘스 도시에 있는 자택을 방문했을 때 태극기를 게양하여 국빈 대접을 받는 듯한 환대를 연출해 주셨고, 신장에 이상이 와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크렘스에서 상트플로리안 수도원까지 2시간 동안 운전을 하시어 아내가 좋아하는 빈필하모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안톤 브르크너의 곡을 감상케 해주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크렘스 부근 2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된 곳까지 안내해준 뒤 그곳에서 발굴된 오스트리아 뷔너스 기념품을, 내가 불자라는 것을 알고 조그만 불상을 구해 선물하셨던 것이다.   

자택 거실에 걸린 배박사님이 직접 그리신 유화들의 솜씨를 보고 나는 거듭 놀란 채 다음번에 방문할 때는 개인 전시회를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배박사님을 생각할 때 가장 감동스러운 점은 그의 손목에 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묻자, "왜 의사가 시계를 보고 진료하느냐?"고 대답하셨는데, 순간 나는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보살이시구나,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료시간이 3분에서 5분에 그치는 우리나라 경우를 생각하니 부끄럽기조차 했다. 공공의사로서 정년이 지나 은퇴했지만 시계를 차지 않는 것이 습관이 돼버린 배박사님이었다.

몇 년을 기다린 끝에 어렵게 신장이식 수술을 했지만 꽃이 피었다가 지듯, 의사 보살 한 분이 지구별을 떠나신 것에 나는 서재에서 진심으로 애도했고 아내는 아침에 쌍봉사로 내려가 배박사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