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 18
(©장명확)
그러나 다음날,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다.
전날 동봉 스님이나 그녀에게 부린 괜한 객기를 후회하면서. 부끄럽게도 마지막이라고 꽁꽁 묶어 두었던 짐을 다시 풀었다. 그리고 점잖게 마을을 내려다본다. 혹여 참으로 걸리지 않아야 할 정신병이 내 몸을 파고들었는지도 모른다.
동굴 바깥은 빗발이다. 온통 겨울을 재촉하는 굵은 빗발 일색이다. 동굴 앞의 굴참나무숲이 울고 있다. 쉐에앵 쉐애앵 서럽게 파도치고 있다. 열어젖힌 거적때기 사이로 우울의 오리나무숲이 일렁이고 있다. 젖고 있다. 눈에 젖고 있다. 바람에 젖고 있다. 눈물에 젖고 있다. 살아 있음의 이 눅눅함,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음으로 하여 모두가 움직이고 있다.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제 나름으로 그 눅눅함을 받아들이고 있다. 약간은 멀리 내려다보이는 노루목의 누렇게 죽은 풀 조차 지난날의 안타까운 삶을 원망하듯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분명히 저것은 좋은 모양새가 되지 못한다. 약속한 시간이 다하여 사라져 가야 할 때 머뭇거리는 것만큼 꼴불견은 없다. 언제나 가는 것은 가고, 오는 것은 오는 것이다. 우리 목숨을 가진 것들의 의지는 그 약속된 시간 너머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못한다. 그 시간이 빠르거나 늦거나, 합당하거나 전혀 합당하지 않거나, 그것은 이미 우리들 소관이 아니다.
살아 있지 못한 것들과 살아 있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뿌려대는 눅눅한 빗발 탓이다. 연기가 오르는 마을, 그 위로도 비는 내리고, 연기가 오르지 않는 마을, 왼편으로 보이는 망자들의 땅에도 비는 내린다. 늑대 못 기슭에 공동묘지가 있다. 그 공동묘지 위로도 비는 내린다. 돌보는 사람이 없는 무덤들.
무슨 이유일까?
사람들은 왜 마을 뒤편에 죽은 자들을 위해 덧없는 무덤들을 만들어 놓았을까?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멀리 느껴진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가장 먼 것이 가장 가까이 느껴진 것일까?” 굳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한켠에 무엇 하러 쓸모없는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는 것일까? 종교의 잠언을 빌리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결국 이름도, 형상도, 본질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그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고, 끝이 너무도 분명한 난파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 난파는 현실성이 없는 살아 있는 것들의 의지와, 일목요연하게 잘 짜여진 현실 세계 사이에서 배태된 불화의 산물이다.
그녀가 꼭 삼 일 만에 약을 가져왔지만 먹지 않았다. 억지로 그녀가 떠먹이고 간 그 약마저 저녁때 모두 토해버렸다. 약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곧 저승으로 갈 상태도 아니었다. 필요한 건 그녀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결국 동봉 스님이나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린 꼴이 되었다. 그녀가 몇 날 며칠이고 백천사에 머물겠다고 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반강제적으로 서울로 올려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다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그녀와는 고정된 집이 아니라 거리에서 만나야 한다.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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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 처녀가 어느 집에 찾아왔다.
그녀는 아름답고 단정하며 값진 영락 구슬로 몸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집주인이 물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 사람이오?”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공덕천입니다.”
주인이 말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왔소?”
“나는 어디를 가거나 온갖 금은과 유리, 수정, 진주, 호박, 마니, 코끼리 수레, 마차 수레, 노비 등을 누구에게나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주인은 기뻐하면서 서둘러 향을 피우고 꽃을 뿌려 공양하고 정중하게 배례했다. 그때 대문 밖에 또 한 사람의 처녀가 있었다. 그 모습은 누추하고 때 묻은 헌 옷은 찢어졌다. 피부는 주름지고 일그러졌는가 하면 나이가 들어 혈색도 나빴다. 주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소?”
처녀가 대답했다.
“나는 흑암녀라고 합니다.”
“어째서 흑암녀요?”
“나는 어디를 가거나 그 집 재산을 몽땅 탕진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주인은 이 말을 듣고 곧 칼을 꺼냈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그대 목숨을 없애버리겠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지혜가 없는 바보군요. 당신 집에 들어가 있는 저 처녀는 바로 내 언니입니다. 나는 언제나 언니와 함께 행동합니다. 당신이 만약 나를 쫓아버린다면 동시에 언니도 쫓아내게 됩니다.”
나는 공덕천만 맞이했다. 공덕천과 흑암녀가 한 줄로 이어진 자매지간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다. 햇빛과 그림자, 행복과 불행, 참과 거짓, 묵은 하늘과 개벽, 그것들이 모두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달마어록』을 펼쳐들고 고개를 흔들고 있는데 경묵이가 왔다.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왜?”
빈말인 줄 알면서도 싱긋 웃었다.
“요샌 잘 때 헛소리 덜 하더라.”
무서운 친구, 하기야 산에 올라오면 그는 언제나 내 얼굴부터 살핀다. 내가 눈치채지 않게 내 안색을 살피느라 고생하는 녀석. 그러나 미안하게도 조만간 막을 내릴 운명을 나는 알고 있다. 번갯불이 파르스름하게 반짝인다. 천둥소리가 먼 하늘로 울려 퍼진다. 이제 밤도 깊었다.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얼굴. 그들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눈물뿐이다. 모두 내 스스로 만든 눈물. 사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기야 나 자신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내가 숨을 쉬고 있고,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이승의 땅 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밤이면 내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 하늘의 별들을 보았고, 그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고 있다.
날개가 있다면, 그리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까지 날아갈 수 있다면, 난 그리 멀지 않은 옛날 내가 한없이 날아다닐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의 별을 찾아 안경을 고쳐 썼지만 그런 별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날개가 꺾인 새처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승이라는 전쟁터에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물러난 부상병으로, 잠깐의 내 쉼터에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 끝끝내 보이지 않는 머나먼 마을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마을은 너무 멀다.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 혼자만의 거리지만.
마을, 나는 저곳을 떠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울었다. 그러나 나는 결연히 마을을 떠나서, 오히려 늘 저 마을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서울에서도, 평양에서도, 신의주에서도 늘 꿈속에 청리산 꼭대기에 올라, 굴참나무숲이나, 오리나무숲, 혹은 잣나무 숲에 가려 나의 마을이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불안에 떨었는지 모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내가 고향을 떠나 떠돌던 그 시절처럼 꿈꾸듯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이파리가 떨어진 산초나무와 들찔레들을 손으로 만지면서 그 열매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다.
가령 동굴 앞 산초나무의 까맣고 앙증스런 열매나, 한창 떨어지는 밤이나 도토리는 옹골찬 그녀를 닮았으며, 연못가 옆에 서 있는 오리나무의 잎사귀는 임순이를 닮았다는 것, 그리고……, 굴 아래편에 외롭게 피어 있는 흰 갈풀 꽃들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 언제나 불빛이 있는 곳, 그리고 언제나 말이 있는 곳이면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마을이란 단어가 ‘말’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지금 내 가족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내 가족들의 실체가 이제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당장 내가 연기처럼 사라지면 고통받게 될 가족들은 하나도 없다. 내 아들, 그 아이는 내 존재를 알지 못한다. 내 아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아이에게 할 말이 있다. 이 하늘 아래에서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아비지만, 그래도 내가 녀석을 이 세상에 나오게 한 통로 역할을 하였으니까……. 연필을 잡은 손이 떨린다. 눈물이 흐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