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정암사 (2)
헌 옷을 태울 때, 같이 버리고 싶은 것
관음전을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소대(재를 지내고 망자의 옷과 위패를 불사르는 곳)가 있습니다. 벽 바깥에 옅게 남은 그을린 자국을 보면, 지은 때가 그리 오래지 않은 듯싶습니다. 소대는 어느 절에서든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는데 새로 지었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지어졌을 것입니다.
기와로 둥글게 벽을 쌓아올린 뒤 수키와와 암키와로 지붕을 올렸고, 그 위에 암막새와 수막새로 받침대를 틀어놓은 다음, 기와로 구운 절병통을 올렸습니다. 보는 순간, ‘사리탑의 새로운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암사 소대
정월 초하루부터 ‘죽는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떨떠름하지만, 1년 365일 중 사람이 죽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병고가 심할 때, 하고자 하는 일이 꽉 막혀 벗어나기가 힘들 때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진짜로 죽을 것 같은 이런저런 일에 부딪히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죽음을 원하였든 원하지 않았든 이 세상과 인연이 끊어졌다면, 남은 가족들은 소대에 와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지내면서 망자가 입던 예쁜 옷이나 아끼던 옷을 태웁니다. 가족들은 이미 망자에게 새 옷을 입혀서, 육도 중 어느 한 곳으로 보내는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때부터 망자는 새로운 인연을 짓기 시작하였고, 전생의 일은 잊게 됩니다. 새 옷을 입고 다른 곳으로 떠났는데, 굳이 이승에서 입었던 헌 옷을 태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일까요?
살아 지내는 동안 “공(空)”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좋아라하며 입었던 옷이 불에 타 사라질 때, 생전에 가졌던 덕지덕지한 욕심도 같이 타버려 “공수래공수거”를 진정으로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곳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소대에서 꼬질꼬질한 욕심을 태워버리고, 청정한 마음으로 정토에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법당을 꾸미는 이유는
관음전은 좁은 마당에 덤벙주초를 놓고 지은 정면이 세 칸인 팔작지붕 집입니다. 평방과 창방에 칠한 단청은 솜씨 좋은 장인이 갖가지 색실로 자수를 놓은 듯하고, 서까래 마구리에 그려진 여섯 개의 꽃잎은 막 피어난 듯 선명합니다.
네 짝인 어간문은 두 짝씩 접어 활짝 열리게 달았고, 좌우측 문은 한 짝은 그냥 열리고 두 짝은 접어 열리게 달았습니다. 열 짝의 문 모두 가로살 세로살을 짜 맞춘 것이 아니라, 통판의 나무에 꽃과 나무 등을 조각하고 남은 부분은 구멍을 뚫어내어 문틀에 짜 넣었습니다. 상서로운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봉황, 모란과 대나무, 연못에서 연꽃을 가지고 노는 잉어, 자라와 산호 등이 문살이 된 것입니다.
관음전
모란과 연꽃 등으로 가득하게 꾸미는 목적은 법당을 아름답게 꾸미려함이겠지만, 그것은 순수하기만 한 마음이라는 생각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법문을 펼치시면 모래같이 많은 중생과 보살마하살이 무상정변지(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계신 보리수 아래 사자좌는 진주 영락과 마니주 영락 등이 두루 드리워졌고, 하늘에서는 만다라 꽃이 비 내리듯 뿌려졌습니다.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보살들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끝없이 노래 불렀습니다.
천상 세계마저도 부처님의 설법에 감동하여 꽃 공양을 펼친 것입니다. 꽃비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나타내는 증표이고, 중생과 보살들이 부처님의 경지에 가까이 간 단계에 이르렀음을 축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보다 더 축하해야 할 만한 경사는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법당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부처님의 법문이 이루어졌던 장소와 그 장소에서 이루어졌던 광경을 보여주려 함입니다. 우리가 들어서려 하는 법당이 부처님이 계신 불국토 임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더 높은 깨달음의 단계로 들어서게 하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어리석은 중생을 성불로 들어서게 하려는 방편이라는 생각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위신력
화려하게 장엄된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을 칭송하는 주련이 걸렸습니다.
관음보살대의왕 감로병중법수향 쇄탁마운생서기 소제열뇌획청량
觀音菩薩大醫王 甘露甁中法水香 灑濯魔雲生瑞氣 消除熱惱獲淸凉
관세음보살은 어리석은 중생의 병을 고쳐주시는 으뜸가는 의왕이시다.
중생들에게 베푸시는 감로와 같은 법문은 너무나도 향기로워서
마군이 몰고 오는 구름도 상서로운 기운으로 바뀌게 하시고
타오르는 번뇌를 사그라뜨려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의역입니다)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은 제도하고자 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춰, 부처 독각 성문과 거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며, 부인과 동남동녀 등 33가지의 몸으로 나타나 설법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갖가지 모습으로 몸을 나투며,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케 하시는 관세음보살의 감로법을 칭송하는 주련이 걸려있는 것입니다.
관음전 옆면과 뒷면에는 관세음보살의 위신력과 자비, 중생을 제도하는 벽화가 그려졌습니다. 고통을 겪는 중생이 벗어나고자 부르짖는 소리를 빠짐없이 들어주신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장면, 장면마다에 관세음보살을 그린 이유는 중생들이 보살의 큰 위신력과 자비심을 봄으로써 초발심이 일어나고, 믿음이 더 커지기를 바라는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죄가 있거나 죄가 없거나 간에 손발에 채워진 수갑과 쇠고랑이 끊어지고 풀어져 벗어나고, 악귀가 악한 눈으로 불자를 보지 못하여 해칠 수 없으며, 도둑의 환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관세음보살보문품)
두타산 기슭에서 늙고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약초를 캐서 살아가는 가난한 총각이 장가를 못간 채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약초를 캐러 갈 때면 작은 암자 앞을 지나다니며 스님의 염불소리를 조금씩 흉내 냈고,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그 공덕으로 총각은 약초를 팔러 장에 나갔다가 만난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관세음보살께서 그 처녀의 꿈에 나타나 총각과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해줬다는 설화가 전해집니다.
관음전에 꾸며놓은 닫집의 화려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공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첨차와 살미로 짜졌고, 그 공포위에 늘어진 지붕선은 양쪽 추녀에서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에선 봉황과 천녀들이 날아드는 장엄을 꾸몄습니다.
보궁 안 연화좌에는 관세음보살께서 연꽃을 들고 좌정하셨는데, 연꽃을 받쳐 드신 것은 중생들이 갖고 있는 불성(佛性)을 받쳐주고 계심과 다르지 않습니다.
관음전 닫집과 관세음보살(사진= 김성채)
관세음보살과 선재동자
보살상 뒤에는 문수전 후불탱화와 같은 검은 바탕에 금물로 선을 그린 먹탱화가 걸렸습니다. 큰 원 안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은 불상에 가려져 양쪽 손만 보입니다. 그렇지만 나타난 두 손만 보아도 낙가산에서 왼쪽 다리는 곧추 세우고, 오른쪽 다리는 암좌 아래로 내려뜨린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래같이 많은 중생들의 한시름을 덜어내시다가 대나무 우거진 숲에서 잠깐 쉬고 계신 모습일 겁니다.
보살님 뒤쪽에 놓인 정병에는 버들가지가 꽂혀있는데, 중생들의 천 가지 만 가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항상 손이 닿는 곳에 대기시켜 놓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원 위쪽에는 지장보살과 함께 아미타부처님을 협시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이 그려졌는데, 사바세계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협시하고, 극락세계에서는 아미타부처님을 협시하시는 능력을 지닌 큰 보살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오른쪽 아래에는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선재동자가 53명의 훌륭한 스승을 찾아다니던 중 보살님께 가르침을 청하면서 합장한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왼쪽에는 관복 차림을 한 두 명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다른 후불탱화에서 보이듯 용왕이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표식도 없고, 보살님을 공경하는 모습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고만 있어서 두 명의 정체가 궁금하였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