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선생과 초의 스님의 우정을 나눈 이야기
‘초의 스님 덖어낸 차 원통을 얻었으니 차 향기와 맛을 따라 바라밀에 들어간다.’
추사 선생 진영과 초의에게 차 선물의 답례로 써준 글씨 명선茗禪.
차와 선은 둘이 아니다.
김명희는 추사 김정희의 동생이며 초의 스님과 교류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국과 조선의 명차를 즐기며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김명희가 초의 스님이 차를 법제하는 모습을 보고 남긴 시가 전한다.
노스님 차 가리기가 마치 부처 고르듯 하구나
일창일기, 엄한 법도대로 엄선했구나
잘 덖어낸 차 원통을 얻었으니
차 향기와 맛을 따라 바라밀에 드누나
이 비방을 오백 년 만에 들추어 냈으니
그 복이 하늘과 땅을 덮으리라.
초의 차를 맛본 김명희의 찬탄이다. 한때 초의 스님이 경주불국사에 잠시 머물 때이다. 마침 추사가 무장사비 탁본과 조사차 경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초의가 추사를 기다리며 남긴 시가 전한다.
오래도록 길에서 선생을 생각하며
자하문 밖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네
세상에서 불국은 차라리 얻기 쉽지만
서로 만나 편안한 정을 다하기는 어려워라.
경주에서 추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추사를 연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추사와 초의는 둘 다 1786년 병오생 말띠이다.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의 소개로 추사를 처음 소개받았다. 그 후 두 사람은 차를 매개체로 하여 시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다. 서로가 서로를 탁마하며 닦아가는 도반으로 발전하였다.
초의는 수행자의 모범을 보이면서 시.서.화.차.향에도 일가를 이루어 조선 후기에 수준 높은 아회雅會를 이끌었다.
추사는 뛰어난 유학자이며 재가불자의 모범이었다. 그는 해박한 불교 지식과 수행체험으로 불교의 사상논쟁을 이끌고 조선 후기 승려들에게 신선한 깨우침을 주었다.
추사와 초의의 우정을 두 사람이 스스로 표현한 문장이 있다.
장무상망長無相忘
우리 오래도록 잊지 말자.
추사가 초의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깃든 표현이다.
초의는 추사를 이렇게 표현한다.
불망상사 상애지도
不忘相思 相愛之道..
서로를 사모하고 서로 아끼는
도리를 잊지 못하는 사이
그들이 차를 통해 나눈 우정은 제주 유배 시절 주고받은 편지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초의 차를 보내지 않으면 내 당장 말을 몰아 일지암으로 가서 차밭을 모두 밟아 버릴 터.
그러나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의 차에 중독 시킨 것은 응당 그대의 몫이려니’
차를 보내달라고 보채는 추사의 어린양에 초의의 답변도 웃음 짓게 한다.
‘어허.. 초의 차에 환장한 사람이구만
마치 양귀비에 중독된 사람처럼
분별없이 글을 쓰셨구만
천하의 추사도 초의 차가 없으면
맥을 못 쓰고 꼬리 내리고 마는구만.’
좋은 차가 몸에 들어감에 귀와 눈이 밝아지고 머리가 맑아지네 차의 기운 온몸으로 퍼져가니 울적한 기분이 사라지고 지친 몸에 생기가 돈다.
차의 효능을 표현한 내용이다. 불가의 수행자들과 유교의 선비들이 좋은 차를 곁에 두고 즐긴 이유이다.
추사는 71세를 살았고 초의는 81세를 살았다. 추사는 임종을 앞두고 초의를 찾았지만 보지 못하고 떠났다.
추사의 임종 소식이 땅끝 일지암에 전해졌다.
초의는 곧바로 바랑을 매고 짚신를 챙겼다.
걸어서 14일 만에 과천의 추사 초당에 도착하였다.
추사 영전에 향사르고 제문을 읽는 초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추사를 떠나보내고 일지암에 돌아온 초의는 이후 한 번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10년 후에 초의도 일지암에서 육신을 떠났다.
초의가 홀로 차를 마시며 노래한 다시茶詩이다...
일지암의 찻 자리
밝은 달은 촛불도 되고 겸하여 친구도 되네
흰 구름은 방석이 되고 찻 자리의 병풍이 되기도 하네
대나무 소리와 솔바람 소리 시원하여 서늘함이 뼈에 스미고 가슴을 열어주네
오직 허락하노니 흰 구름과 밝은 달로 두 손님을 삼으니 도인의 찻 자리가 이보다 나을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