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가을에 나를 본다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1
이불재 짓고 나서 기념식수한 아기단풍나무가 어엿한 성년이 되어 자해(自害)하듯 선혈 같은 핏빛을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초겨울 삭풍이 처연하게 불기 시작하면 저 단풍잎도 피딱지같이 지쳐 떨어져 버리면 마당가 산벚나무처럼 홀가분한 나목이 될 것이다.
단풍나무도 생로병사에서 예외는 아닐 터이다. 다만 단풍나무 가지들이 잎을 떨구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새봄을 기다리겠다는 의지이리라. 수액이 뿌리로 돌아가는 것도 새봄까지 동사(凍死) 하지 않겠다는 방어적 본능이라고 한다. 육조 혜능대사는 낙엽귀근(落葉歸根), 낙엽이 뿌리로 돌아간다는 선어(禪語)를 남겼다. 내게는 근본을 사유하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가을은 걷던 길을 잠시 멈추고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는 자리를 깊이 들여다보고, 갈 길을 재삼 숙고하라는 계절이 아닐까 싶다.
문득 나를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게 한 단풍나무가 새삼스럽게 고맙다. 자신을 선홍빛 노을인 양 스스로 숨 가쁘게 불태우고 있는 단풍나무가 한순간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나까지 물들이고 있다.
2
동국대 국문과 후배이자, 현 동국대 사범대 학장인 현담(玄潭) 윤재웅 부부가 이불재를 찾아와 차담과 점심을 함께 하고 갔다.
현담은 선물로 약사인 부인이 선택한 듯 유산균 증식약을 가져왔고, 나는 모과나무 아래 떨어진 모과를 쇼핑백에 한가득 담아 주었다. 거실이나 서재에 모과를 둔다면 아마도 겨우내 향기를 듣지 않을까 싶다. 옛 선비들은 이를 문향(聞香)이라 했다.
사립문 앞에서 파이팅 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모두의 일상이 김장 배춧속처럼 맛있고 신선하게 더 꽉 찼으면 좋겠다. 또 그렇게 되기를 발원해 본다.
3
사립문 옆 감나무 감들을 손에 닿는 것들만 땄다. 감 이름은 월하시(月下枾)이고, 조선 땅에 붙박이로 살아온 토종이다. 달빛 아래서도 익는 감이라고 조상님들이 낭만적인 이름을 붙였을까? 아무튼 손에 닿지 않는 녀석들은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다. 사다리를 바치고 따는 것은 욕심이고 자연스럽지 못한 짓이다. 하늘이 기른 녀석들이니 바깥주인(날짐승)과 나누어 먹는 것이 도리일 듯싶다. 탐욕스럽게 먹는 인간과 달리 소식(小食)을 하는 이불재 주변의 새들에게는 그런대로 겨울 양식이 될 것이다.
아내와 함께 딴 감으로 이미 홍시가 되어가는 물러진 녀석들은 놔두고, 단단한 감들만 깎아서 햇볕이 잘 드는 빨래건조대에 걸어 두었다. 늦가을 볕에 오롯하게 말린 곶감들을 제사 때 진설하고 싶다. 선친께서 곶감을 드시고서 맛있다고 하실지 궁금해진다.
4
무슨 일이든 때가 있다. 어제 동쪽으로 난 산방 창문 두 개를 비닐로 감쌌다. 이른바 겨울나기 준비다. 이곳 산중은 아래 절이나 평지보다 4도가 낮다. 삭풍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위세를 부리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아침이다. 어제 월동준비는 시의적절했던 것 같다. 산방 마당가의 목련도 겨울나기 준비에 철저한 모습이다. 잎눈과 꽃눈이 솜털 같은 것에 두툼하게 쌓여 있다. 혹한에 얼어 죽지 않고 내년 봄에 잎과 꽃을 피우기 위한 의지로 보인다. 목련의 겨울나기 과정을 보았으니 2023년 목련의 신록과 개화(開花)가 눈에, 마음에 더 오롯하게 들어올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