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일장춘몽” 임을 보여주는 대방
가람배치도에 “대방(大房)”으로 안내된 전각에 걸린 현판은 “봉원사(奉元寺)”입니다. 전각에 사찰 이름의 현판을 거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대방의 용처는 염불당(念佛堂)으로 스님들이 염불수행을 하는 곳입니다.
영산재가 시연되는 장소는 대방의 앞마당입니다. 스님들은 대방에 보관해온 준비물을 마당으로 이동시키고 설치하느라, 대방 마루부터 마당까지는 부산했습니다. 이는 비오는 바람에 할 일이 더 많아진 때문이었는데, 조용하다면 그것도 정상이 아닐 겁니다.
영산재는 오전 10시에 시연될 예정이었지만, 시연이 시작되기 전에 도량을 둘러볼 생각으로 8시가 되기 전에 도착하였습니다. 도량 경내를 기웃거리느라 시간은 제법 흘렀습니다. 시연시간은 가까워지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스님들은 점점 더 급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치는 차일이 마당 하늘을 크게 가렸는데, 한 스님은 장대로 차일 이곳저곳을 치올려 고인 빗물을 연이어 쏟아냈습니다.
대방은 흥선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 본채를 축소 변형시켜 지은 건물입니다. 별장 여러 채의 칸수를 합하면 ‘아흔아홉 칸이나 되었다’하니, 당시에 대원군이 누렸던 권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채의 목재를 덜어내고 지었음에도 대방의 정면 폭이 일곱 칸이나 되었으니, 대원군 별장의 본채가 ‘얼마나 크게 지었던 집이었을까?’ 궁금해 졌습니다.
그랬던 대원군은 며느리에 의해 유폐되었고, 별장에서 덧없는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자기 스스로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비웃는다.”라는 의미로 붙여진 집 아소정(我笑亭)은 목재 값으로 봉원사에 팔려왔습니다.
사구게가 생각납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은 꿈이고 환상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와 같으니라. 모름지기 이와 같이 살펴보도록 하라.’
(왼쪽부터)“산호벽루”, “무량수각”, “청련시경”
“산호벽루” ‘산호 짙푸른 나뭇가지가 서로 얽힌 듯하구나’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서체를 이르는 말입니다.
“무량수각” 무량수각은 “극락보전”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청련시경” ‘푸른 연꽃이 시를 읊어낼 정도로 아름답다’는 글귀. 왼쪽에 새겨진 “완당”은 추사의 또 다른 호입니다.
대방 앞쪽 퇴칸에는 마루를 놓았고, 안쪽 방바닥과 나무마루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달았습니다. 문짝을 떼어내고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상인방의 위쪽에 현판 세 점이 걸렸습니다.
“청련시경(靑蓮詩境)”와 “산호벽루(珊湖碧樓)” 두 점은 유명한 서예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고, 다른 한 점 “무량수각(無量壽閣)”은 추사의 스승인 청나라 옹방강이 쓴 것입니다. 붓에 먹 한번을 찍어서 쉼 없이 한 글자를 써 내리는 필력. 두 손으로 잡아야 할 정도의 굵은 붓을 휘두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박학다식하고 글씨 잘 쓰기로 유명한 분의 작품이 어떤 경로로 봉원사에 와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대원군이 추사의 제자였고, 추사는 스승인 옹방강이 넘겨준 책과 서첩으로 공부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아소정에 걸어보시라’ 고 추사가 대원군에게 준 현판이, 가옥을 뜯어올 때 덤으로 묻어온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무량수각은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하는 전각 “극락보전”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인지 대방에는 아미타부처님을 칭송하는 주련이 걸렸습니다.
아미타불재하방 착득심두절막망 염도염궁무념처 육문상방자금광
극락당전만월용 옥호금색조허공 약인일념칭명호 경각원성무량공阿彌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極樂堂前滿月容 玉毫金色照虛空 若人一念稱名號 頃刻圓成無量功
아미타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잠시라도 잊지 말라.
생각하고 생각 다 해 무념처에 도달하면 육문에서 금색 광명이 빛나리라.
극락전 앞에 보름달 같이 밝은 모습으로 금빛의 보배 빛살은 허공 가득 비추나니,
누군가 있어 명호를 일념 다해 부른다면 깜박할 사이 깨달아 무량 공덕 이루리라.
영가님은 지금 어디쯤 가고 계시나요?
사람이 죽게 되면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죽음의 세계에 적응할 때까지, 육체와의 인연이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 기간을 중음(中陰)이라 하고요. 중음의 기간은 사람 사람마다 다르고, 그 과정도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대부분은 49일간이라 합니다. 죽음을 맞은 중음 기간을 잘 치러내지 못하면 영혼분리가 순조롭지 이루어지 않은 때문에 사후(死後)의 삶이 원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이룬 모두를 뿌리째 벗어내어 혼백이 홀로 맑아졌다(형탈근진 영식독로)’는 게송이 있는가 봅니다.
이런 때문에 망자의 혼백을 일정기간 잘 모셔야 한다는 관념이 생겨났고, 이를 위하여 지어놓은 전각이 영안각이라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전통사찰 여러 곳을 찾았지만 “영안각(靈晏閣)” 같은 기능(?)을 지닌 전각은 처음입니다.
그 중음을 겪을 망자가 영안각에 끊임없이 들어왔을 겁니다. 중음의 기간에 망자에게 일어나는 일은 은밀한 것으로, 잡인의 출입이 없어야 하는 까닭에 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봉원사 전각들이 모두 아름답게 단청되어 있는데, 문을 열 수 없는 이유를 지닌 영안각은 단청을 입힐 겨를이 없어서 추레해졌습니다. 주련은 읽어낼 수 있지만 현판은 간신히 읽어야할 정도입니다. 망자에게 궁금함을 물어보는 주련이 걸렸습니다.
제령한진치신망 석화광음몽일장 삼혼묘묘귀하처 칠백망망거원향
諸靈限盡致身亡 石火光陰夢一場 三魂苗杳歸何處 七魄茫茫去遠鄕
모든 영가시여, 목숨이 다하여 몸을 잃었으니,
부싯돌에서 튄 불꽃이 금방 사라지듯 인생은 한판의 꿈입니다.
정신을 맡았던 넋은 어디로 갔고, 육신을 맡았던 넋은 어디만큼 멀리 갔는가요.
(의역입니다)
육신과 영혼을 나누는 강, 낙하담(落河潭)
영안각 옆에 육면체로 깎은 돌의 윗면을 얕게 파낸 다음에 돌기둥 위에 세워 놓았는데, “낙하담”이라는 이름을 새겼습니다. ‘(넋이) 흩어지는 깊은 강’이라 해석하면서 “서유기”가 생각났습니다.
천축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간 당승 삼장법사는 천신만고 끝에 영취산 자락에 이르렀고, 사납게 흐르는 강물을 건너야 했습니다. 강을 건너야 부처님을 뵙고 경전을 받을 수 있는데, 강을 건너려면 밑바닥이 없는 배를 타는 방법뿐입니다.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스르며 삼장법사는 자신의 몸뚱이가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강을 건너면서 삼장법사의 영혼은 더 맑은 영혼으로 거듭납니다.
엉뚱한 상상을 했는데, 낙하담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이 장엄이다!’를 보여주는 칠성각
봉원사 칠성각은 기둥 간격이 넓지 않은 세 칸의 맞배지붕 집입니다. 그렇게 작은 집이지만 겹처마를 올렸고, 그 밑에는 다포로 짠 소의 혀처럼 생긴 익공 두 개가 하늘로 뻗쳐 올라갔습니다. 그런 익공 위쪽엔 활짝 핀 백색 청색 적색의 연꽃을 조각해 올렸습니다.
비단에 수를 놓듯 한옥 부재 마다마다에 금단청을 올려 부처님 집으로의 화려함을 그려냈습니다.
포와 포 사이에 만들어지는 삼각형의 포벽에는 불보살 또는 나한이 그려지는데, 봉원사 칠성각 포벽에는 연꽃에 금빛구슬이 앉았고 광배가 찬란하게 퍼졌습니다. 금빛구슬과 광배가 치성광여래로 보인 것은 ‘칠성각에는 치성광여래가 모셔져있다’는 생각이 가득한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많은 사찰에서 칠성각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칠성탱만 걸려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칠성탱에는 중앙에 광배가 멋진 치성광여래가 좌정하셨고, 칠여래와 월광보살과 일광보살, 칠원성군 등이 그려집니다. 전각 정면에 만들어진 일곱 개의 포벽에 그려진 금빛구슬 일곱 개도 ‘일곱이라는 숫자를 염두에 두어 법당을 짓고, 공포도 그렇게 의도적으로 올린 때문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봉원사 칠성각 상단에는 중생들이 겪는 끝도 없는 고통을 없애주는 약사여래부처님이 약합을 들고 좌정하셨습니다. 법당 안에 들어가 약사불과 내부 구조도 보고, 벽마다에 걸린 탱화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영산재를 잘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심이 더 컸던 탓에 선뜻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바깥에서 기웃거리면서 전각은 치성광여래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는데, 모신 부처님은 약사여래불이고, 주련은 치성광여래를 찬탄하는 글귀라서 호기심이 더 커졌습니다.
영통광대혜감명 주재공중영무방 나열벽천임찰토 주천인세수산장
靈通廣大慧鑑明 住在空中映無方 羅列碧天臨刹土 周天人世數算長
영통함이 끝없이 크고 지혜도 밝으신 치성광여래님
공중에 계시면서 온 세상 곳곳을 비춰주시네.
푸른 하늘도 덮을 수 있는 그물을 놓듯 이 땅 곳곳에 임하시어
하늘과 땅에 있는 중생의 수명을 늘여주시네. (의역하였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