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지 말고 담마를 보아라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마중물 생각
이불재 마당에 봄꽃이 피었다. 연못가에 핀 홍매화 꽃과 사립문 위 쪽 뜰에 핀 노란 복수초 꽃이다. 꽃은 나올 때를 알고 물러갈 때를 안다. 진퇴(進退)를 거스르지 않는다. 꽃처럼 나를 기꺼이 맞아주는 것도 없다. 사람은 옆에 있어도 그립다고 하지만 꽃은 언제 보아도 반갑다. 꽃에는 보수나 진보가 없으니 더 좋다. 제 개성대로 온전함이 있을 뿐이다. 온 나라가 후보들에게 열광했던 대선 선거가 끝난 새벽이다. 사람도 보수나 진보가 없다면, 동(東)과 서(西)가 없다면, 아니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초월해 있다면 자신만의 개성이 왜곡되지 않고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부처님도 형상을 보지 말고 담마(Dharma), 즉 진리를 보라고 하셨다.
부처님 말씀과 침묵
부처님께서 라자가하 밖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박칼리라는 비구가 라자가하에 있는
어떤 도공의 집에서 앓고 있었다.
병이 날로 위독해 회복하기 어려웠다.
그는 곁에서 간호하고 있는 스님을 불러서 말했다.
“스님, 미안하지만 부처님께서 계시는 죽림정사에 가서
부처님께 제 말을 전해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내 병은 날로 더해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소원으로 부처님을 한 번 뵙고 싶은데,
이 몸으로 죽림정사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제 뜻을 부처님께 아뢰어 주십시오.”
스님은 부처님을 찾아가 박칼리의 소원을 전해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그 길로 도공의 집으로 오셨다.
박칼리는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앓는 몸을 뒤척였다.
부처님께서는 박칼리의 머리맡에 앉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 말씀하셨다.
“박칼리여, 그대로 누워 있거라. 일어날 것 없다.
병은 좀 어떠냐, 음식은 무얼 먹느냐?”
박칼리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고통은 심하고 음식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병은 더하기만 하여 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박칼리여, 후회되는 일이나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은 없느냐?”
“부처님이시여, 저는 후회되고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뵙고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후회되고 원통합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정색을 하고 말씀하셨다.
“박칼리여, 이 썩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담마(진리)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사람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담마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려거든 담마를 보아라.”
부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형체를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형체는 덧없는 것입니다.”
“감각. 생각, 의지 작용. 의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도 덧없는 것입니다.”
“박칼리여, 덧없는 존재는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주체가 없다.
덧없는 것에는 나와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봄으로써 내 제자들은 형체와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을 싫어하고 욕심을 떠나 해탈하고
해탈의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박칼리는 지혜의 눈을 떴다.
― 『잡아함雜阿含 발가리경跋迦梨經』
갈무리 생각
가랑비가 밤새 내렸다. 비도 내리는 뜻이 있겠지 싶어 오늘은 마당으로 나가서 잔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다. 봄을 재촉하는 비 같아 ‘봄손님’이라고 이름 지어 바라볼 뿐이다. 사립문 앞의 푸른 대나무들이 가랑비를 맞고 우죽(雨竹)으로 변신해 있다. 키 큰 대나무 가지가 비에 흠뻑 젖어 편하게 누워 있다. 내 산방 이불재는 오늘 하루는 고립되고 나는 외로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외로움이 내 삶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이다. 외로움은 두려움과 동의어가 아니다. 사람이 오지 않는 날이면 나는 자연과 더 가까워진다. 때로는 담마를 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