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고의적인 불교지명 삭제 의혹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 문제를 최초로 밝혀 고발했던 박호석 전 농협대 교수가 <불교에서 유래한 상용어·지명 사전>(불광출판사)을 발간해 화제다.
이 사전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상용어와 지명 가운데 불교에 뿌리를 둔 어휘만을 가려 뽑아서 사전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조상들의 삶과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우리말과 지명에 담긴 불교문화를 630여 개의 상용어와 540여 개의 불교관련 지명을 통해 정리한 역저 중의 역저다.
4년 전부터 불광출판사와 함께 이 사전의 발간을 준비해온 박호석 전 교수는 책의 원고가 마무리 될 즈음, 현 정부의 불교지명 없애기 의혹이 사실로 불거지면서, 도로명 주소 도입으로 인해 사라지는 전국 불교지명 100여 곳을 긴급히 조사해, <미디어붓다> 등을 통해 세상에 고발함으로써, 이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문제화 시킨 바 있다.
사전 간행을 위해 미리 불교지명을 조사해놓지 않았더라면, 불교계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정부의 도로명 주소 도입으로 인해 불교지명은 대거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박 전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의 가피가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지명에는 반드시 유래와 연원,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명이 왜곡되고 변질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왜곡과 변질의 역사가 깊습니다. 저는 이런 왜곡과 변질을 주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가 그렇지 않습니까.”
“지명의 왜곡과 변질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역사를 왜곡하는 주도면밀한 문화침탈”이라고 강조한 박 전 교수는 “엄청난 세력,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고 확신했다.
“‘매향리(埋香里)’를 예로 들어볼까요. 매향은 미륵불이 오시면 피울 향을 미리 바닷가에 묻어둔 것의 지명이지만, 묻을 매(埋)자가 좋지 않다는 얼토당토한 이유로 매화 매(梅)로 바꿔 매향리로 지명을 바꿨다가, 이제는 아예 ‘매화(梅花)’로 지명으로 바꾸기 까지 했습니다. 이것을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지명뿐 만이 아니다. 불교의 대표 용어인 ‘참회(懺悔)’가 어떤 사전에서는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용어로 알고 있는 ‘교회’, ‘성당’, ‘천당’, ‘장로’, ‘집사’, ‘전도’와 같은 용어들도 그 뿌리가 불교라는 것을 모르는 불자들이 많다. 박호석 전 교수는 이런 안타까운 현상들을 접하면서 과연 불교에서 유래한 우리말이 어떤 것이 있고, 또 얼마나 되는 것인지를 조사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문화, 특히 불교문화를 사랑하는 그의 돈독한 신심이 이런 작업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작가’, ‘각색’ 등의 무수히 많은 용어가 불교에서 연원한 것임을 이 사전은 낱낱이 밝히고 있다.
이 책에는 우리말과 지명에 담긴 불교문화의 연원이 담긴 630여개의 단어와 불교관련 지명 530여개가 포함되어 있다. 지명의 경우 해당 지역의 향토문화원의 자료를 참조해 정확성을 기했다.
“불교상용어와 지명을 조사하면서 이렇게 많은 불교 관련 용어와 지명이 있는 지 놀랐다”는 박 전 교수는 “용어와 지명이 변질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지자체가 지명의 유래를 숨기거나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지명은 조선시대에 한 차례 왜곡됐고, 일제강점기에서 다시 왜곡 변질됐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다시 왜곡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가 사라지고, 전통의 뿌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자체 등에서 행해지고 있는 지명 왜곡 사례를 끝임 없이 감시 보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박 전 교수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지명 왜곡 사례로 사동리(寺洞里)를 들었다. 유학자들이 절 사자가 들어간 지명을 피하기 위해 절 사(寺)자 옆에 말씀 언(言)자를 붙여 ‘시동리(詩洞里)’로 지명을 바꿨다는 것이다.
또 일제강점기 때의 사례로 1914년 일제 행정개혁 당시 전라도 광산군과 익산군의 면 지명인 미륵면과 제석면, 극락면 등의 지명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다고 밝혔다.
박호석 전 교수는 “현 정부의 도로명 새주소가 종교편향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문화재를 보유한 곳을 제외하고 종교 관련의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은 오랜 역사 동안 민족 문화와 정서를 이끌어온 사실상 유일한 전통종교인 불교계에서 볼 때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고, 결과적으로 ‘역사’가 있는 지명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교묘한 종교편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펴낸 이 사전은 완결판이 아닙니다. 처음 시도한 사전인 만큼 부족한 점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많은 분들의 질정과 비판을 수용해 앞으로 더 보완해나갈 생각입니다. 시작이 중요하고, 이제 이렇게 시작을 한 만큼 보다 완벽한 불교 상용어와 지명을 정리한 완벽한 사전으로 만들어나갈 일만 남았지요. 교계 불자님들이 이 책을 사랑해주시고, 많이 이용하면서,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신다면 그 날이 더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박호석 전 교수는 조계종 결사추진본부 등이 참여하는 ‘우리 땅이름 살리기 시민모임’이 7월 27일 개최하는 ‘새 도로명주소, 전면 폐기 촉구 토론회’에 이 문제를 처음 지적하고 여론화시킨 자신이 초청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그는 “아마도 총무원이 이런 문제에 대해 초기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며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점을 지적한 언론의 보도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남아 있는 모양”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박호석 전 교수는 불교계와 항일운동가단체 등에서 개운사로, 보문사로 등 사라진 도로명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서, 도로명 주소 바로잡기 운동이 새 주소 체계 도입으로 읍동리 등이 대거 사라진다는데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자료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든 최초 당사자이다. 문제가 된 길 이름을 바로잡는 것을 계기로 불교식 이름의 읍동리 수백 개가 사라지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조계종 총무원 등 불교계의 각성을 이끌어낸 것이다.
우리가 사는 터전의 이름, 지명과 가장 오래된 상용어이자 지켜야 할 정신적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연과학자인 박호석 전 교수가 기울인 노력은 어떤 이유에서든 이런 작업을 해오지 않았던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이 사전의 감수를 맡은 정병조 금강대학교 총장은 “이 사전은 불교, 국어, 민속 분야의 귀중한 자료로서 크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이 사전의 발간을 계기로 아직 발굴되지 않은 많은 불교어휘나 지명이 이 책을의 출간과 함께 드러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한 사람의 감수자인 최명환 공주대학교 명예교수는 “이 사전은 누구나 외연을 잘 알고 있는 불교어에 대하여 내포적 정의를 마련함으로써 사전의 구실을 잘 살렸으며, 이런 의도를 살리고자 설명방식을 논증구조로 짰다”며 “불교어에 대한 이해로 신앙과 문화를 논리화하도록 풀이하는데 초첨을 맞추었으므로 이 사전의 보급으로 불자의 설득 언어가 논증 언어로 거듭나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편저자 박호석 전 농협대학 교수는?
충북대 농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농촌진흥청 농업기계화연구소 농공연구사, 농협대학 농공기술과 교수, 프랑스 국립 파리농학연구원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농업사학회와 한국과학사학회 회원이다. ‘동서양 쟁기의 발달과정’ 등 30여 편의 논문과 <한국의 농기구>, <바로 지금뿐, 따로 때가 없다> 등의 저서가 있다. 육군 제1공병여단 법왕사와 육군 군수지원사령부 제11보급대대 안국사의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