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직접 듣고 기록한 효봉 스님의 상당 법어
1948년 해인사 가야총림부터 1960년 동화사 금당선원까지
도서출판 어의운하가 한국 근현대불교에서 대표 선지식인 효봉 스님의 1948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법문(해인사 가야총림)부터 1960년 1월 15일 동안거 해제법문(동화사 금당선원)까지 설하신 상당법어를 묶어 『효봉 노트』를 출간했다.
여기에 수록된 효봉 스님의 법어 중 가야총림에서 설하신 것은 시자인 보성 스님이 초록한 것이며, 동화사에서 설하신 법어는 제자인 법흥 스님이 기록해 놓은 것으로 이 법어들은 훗날 ‘효봉문도회’에서 한글로 옮겼다.
이 책에 실린 효봉 스님의 상당법어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설한 법어 27편,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설한 12편, 그리고 통영, 진주, 서울 등에서 설한 5편 등 총 44편이다.
상당법어는 법당 중앙의 법좌에 올라 거행하는 설법으로 주로 초하루, 보름, 입제, 해제 등 특별한 날에 이루어진다. 이 책에 실린 효봉 스님의 법어는 대부분 참선하는 비구와 비구니에게 교학을 설명하기보다 선지식으로서 선지를 드러내고 제접하는 목적이란 것을 이해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 형식은 선지를 펼치고, 게송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는 전통적 선지식의 법어인 것을 알 수 있다.
효봉 스님의 법어를 보면 크게 약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많은 법어는 안거의 결제와 해제 법어다. 그리고 성도절, 열반절 법어를 통해 효봉 스님의 부처님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법어의 내용에서는 조사어록과 경전을 많이 인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황벽의 전심법요, 완릉록, 선문염송설화, 금강경, 화엄경, 대승기신론 등의 내용이 법어에 많이 들어 있다.(이 점은 지원 스님의 박사 학위 논문 ‘효봉 원명의 선사상 연구’에서 분석했다.)
효봉 스님
효봉 스님은 대중과 안거를 하며, 당신 스스로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예컨대 1948년 10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의 동안거 결제 법어 중 이런 말씀을 한다.
“이번 겨울 안거 동안에 이 산승은 여러 대중과 함께 한배를 타고 물결 일지 않는 바다를 건너 바로 피안으로 건너가리니, 대중은 맹세코 다시는 진흙을 묻혀 물에 들어가지 말고 나와 같이 가자.”
더불어 제자들에게 출가의 초심을 강조하며, 제자들에게 출가의 길을 스스로 엄중하게 묻게 한다.
“출가한 대중은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의식衣食을 구하려 하는가, 명리名利를 구하려 하는가, 재색財色을 구하려 하는가? 그 모두가 아니라면 그럼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오직 한 가지 일(一件事)이 있으니 이제 내가 그대들을 위해 말하리라. 자기 한 몸만을 위해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으며 계율을 지키고 아란야(阿蘭若:寂靜處)에 살면서 해탈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참 출가出家라 할 수 없다.” (1949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어 중)
효봉 스님은 해제 법어에서는 해제 후 수좌에게 필요한 당부와 경책을 한다. 효봉 스님이 제자들을 아끼는 마음이 드러난다. 때론 강하게 때론 부드럽게 지도하는 스승의 모습이 보여진다. 또한 출가자와 재가자를 같은 석가여래의 제자로 보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결제結制 당시에 이르기를 금불金佛은 용광로에 견뎌내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에 견뎌내지 못하며, 토불土佛은 물에 견뎌내지 못한다 했다. 용광로에 들어가도 녹지 않고 불어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풀리지 않는 불상佛像을 이번 여름 안거 구십 일 동안에 각자 조성造成했으리라 믿는다.”(1949년 7월 15일)
“지옥地獄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가사를 입고도 큰일(大事)을 밝히지 못한 채 사람의 몸을 잃어버리는 그것이 고통 중의 고통이다. 내가 본래 이곳에 온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며 의식을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이 가운데 사람을 얻기 위해서이니 금년 안에 하나나 반이라도 얻는다면 여기 모인 대중과 이곳에서 목숨을 마치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여러분을 버리고 푸른 구름과 함께 떠나가리라.” (1950년 1월 15일)
“대중에게 묻겠다. 여기 모인 대중 가운데 수사자가 낳은 새끼를 보았느냐? 본 사람이 있거든 나와서 일러라.”(1960년 1월 15일)
스님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직접 대중에게 묻기도 하며, 선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열반을 표현하기도 한다.
“공연히 무슨 마음을 내어 저 설산雪山에 들어가 6년 동안 잠자코 앉아 무슨 일을 하였던고. 오늘 밤 샛별 보고 도를 깨쳤다 하였지만 도란 무슨 물건이며 깨침이란 또 무엇인가.”(1948년 12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성도절 법문)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지금부터 2899년 전 임신년壬申年 2월 15일, 열반회상涅槃會上에서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대중에게 고하시기를 ‘그대들은 내 자마금색紫磨金色의 몸을 잘 보고 우러러봄으로써 만족하여 다시는 후회하지 말라. 만일 나를 멸도滅度했다 하더라도 그는 내 제자가 아니며, 나를 멸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지금 대중에게 묻노니,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제자(佛弟子)가 되겠는가? 이 말끝에 머리를 돌리지 못하면 그는 부처님의 적자嫡子는 고사하고 서자庶子도 되지 못할 것이다.”(1950년 2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열반재 법문)
효봉 스님과 함석헌 선생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대중들과 대승기신론을 연찬한 것을 알 수 있는 법문이다. 역시 효봉 스님은 대중에게 계속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특이하게 비구 영가를 위한 법문을 하였다.
“지금 여러 대중은 한 마음 한 정성(同心同誠)으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산림을 다 마쳤다. 그러면 거기서 마명대사馬鳴大士를 친견하였는가? 마명대사를 참으로 친견하려면 모름지기 문자文字 밖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 문자文字가 있는 『대승기신론』의 논주論主는 마명대사이지만 문자 없는 대승기신론의 논주는 누구인고? 다시 묻노니 이 『대승기신론』이 말세 중생의 신근信根을 키웠는가, 혹은 말세 중생의 신근을 끊었는가?”(1950년 1월 7일)
“문성文成 영가여, 위에서 말한 법문法門을 알겠는가? 알 수 있다면 천당天堂과 불찰佛刹을 마음대로 소요할 수 있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거든 이 산승山僧의 말후末後의 게송을 들으라.”(1950년 여름 해인사 가야총림)
효봉 스님이 구체적 예를 들어서 법을 설명한 법문 중 가장 두드러진 내용이 바로 ‘계정혜 삼학’이다. 당시 효봉 스님은 선지식 중 누구보다 계율을 강조한 선지식이다.
“이 문門이란 계율·선정·지혜의 삼학三學을 가리킴이다. 이 삼학三學은 마치 집을 는 것과 같으니 계율은 집터와 같고, 선정은 재목과 같으며, 지혜는 집 짓는 기술과 같다. 아무리 기술이 있더라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또 재목이 있더라도 터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삼학三學을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 삼학을 함께 닦아 쉬지 않으면 마침내 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이미 발심하여 공문空門에 들어왔다면, 세상 인연을 아주 끊고 불조佛祖의 가르침에 의해 이 삼학을 부지런히 닦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은 각각 저울을 가지고 날마다 닦는 공부의 그 무게를 검토할 때에 반야의 힘(般若力)과 무명의 힘(無明力)을 자세히 저울질해 보아야 할 것이다.”(1954년 7월 24일 선학원)
“계戒가 없이 혜慧만 닦으면 건혜乾慧이므로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은 고불古佛 고조高祖의 출입문이므로 이 길이 아니면 외도법外道法이다. 또 정중定中에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사람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것이고, 정력定力이 없으면 화두가 자주 끊어진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아난존자阿難尊者에게 말씀하시기를, ‘백년 동안 혜慧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정定을 익히는 것만 못하다(百年學慧 不如一日習定)’고 하셨으니, 부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1958년 12월 1일 동화사 금당선원)
효봉 스님은 제자들에게 적지 않은 경책을 한다. 더불어 경책에 머물지 않고, 선지식으로서 제자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지 제시한다.
“슬프다. 오늘날 말세에 이른바 선禪을 공부한다는 무리들은 모든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면서 왜 자신의 그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지 못하는가. 생사生死를 벗어나려 한다면 그 마음이 마른 나무나 돌멩이와 같고 불 꺼진 찬 재와 같아야 비로소 조금 상응相應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다른 날 저 염라 늙은이의 철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가사袈裟를 입고서도 사람의 몸을 잃는다면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 한 가닥 활로活路를 그대 위해 열었나니 더디면 더딘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마음대로 오가거라 해 저물어 혹 머무를 곳 없어지면 문득 밝은 달을 만나 티끌 속을 벗어나리.”(1949년 5월 15일)
“내가 법문 할 때마다 한 마디 던지는 것은 대중 가운데 일척안(一隻眼 : 뛰어난 안목)을 갖춘 이가 있는가 해서다. 확실한 증처證處대로 답하고 장난삼아 함부로 답하지 말라.” (1958년 1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이 책은 『曉峰法語集』 중 효봉 스님이 1948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법문(해인사 가야총림)부터 1960년 1월 15일 동안거 해제법문(동화사 금당선원)까지 설하신 상당법어를 묶은 것으로, 일부 한문 표기는 가독성을 위해 뺐다. 상당법어의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한문본을 보고 싶은 독자는 『曉峰法語集』을 참고하기 바란다. 독자들은 법어를 읽으면서 70여 년을 거슬러 효봉 스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지식이 귀한 시대에 이 책이 선禪의 울림이 되길 바란다.
효봉 지음 ∥ 출판사 어의운하
판형 127*197*55mm ∥ 208쪽
정가 12,000원
효봉 스님은 누구인가?
효봉 스님(1888~1966)은 흔히 ‘절구통 수좌’ ‘판사 중’ ‘늦깎이 중’ 등의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절구통 수좌’는 효봉 스님이 출가 이후 참선 정진할 때, 그리고 금강산 법기암 토굴에서 1년 6개월 동안 스스로 갇힌 채 정진할 때의 모습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스님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 평양 등에서 판사를 하다, 사형 판결에 대한 깊은 회의로 판사복을 벗어던진 후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아 금강산 신계사로 출가한다. ‘늦깎이 중’은 출가 나이가 당시로는 아주 늦은 나이인 38세였기 때문이다.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 선원에서는 안거에 들어갈 때 미리 이렇게 양해를 했다고 한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 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을 할 수 없습니다. 묵언을 하면서 입선入禪과 방선放禪, 행선行禪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만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사실, 이런 이미지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효봉 스님을 경허, 만공, 한암 등의 선사들과 함께 한국 근현대불교에서 대표 선지식으로 있게 한 효봉 스님의 선 수행이다.
효봉 스님은 출가 후 용성, 수월 선사 등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 이후 운수행각과 용맹정진을 한다. 1년 6개월 동안 토굴에 스스로를 가둔 채 1931년 금강산 법기암 무문관 토굴에서 오도한다. 그 후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덕숭산 수덕사 등에서 만공, 한암 선사의 회하에 정진한다. 이후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1937년부터 10년 동안 주석하며 ‘제2 정혜결사’를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1938년에는 보조국사 16대손인 고봉국사로부터 몽중법어를 듣고 난 후 법명을 학눌, 법호를 효봉이라 한다. 몽중법어는 효봉 스님의 선에 중요한 전환이 된다. 이후 효봉 스님이 자신에게 3명의 스승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 한 명이 보조인 것은 스님이 선이 보조지눌의 선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산승은 상세上世에는 육조를 섬기고, 중세中世에는 조주를 섬기며, 하세下世에는 보조를 섬긴다.”(1949년 9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송광사 삼일선원에 주석하면서 한국불교의 젊은 인재들이 효봉 스님 회하에서 수행 정진하는데, 성철(1912~1923), 일타(1929~1999), 탄허(1913~1983) 등 젊은 인재들이 삼일선원에 모여들었다. 이런 움직임은 스님이 송광사 삼일선원을 떠나 해인사 가야총림으로 옮기는 1946년 11월까지 이어진다.
해방 후 한국불교는 교단의 수행 결사 운동이 시작된다. 그 첫 시작이 해인사 가야총림 건립이었고, 교단에서는 초대 방장에 효봉 스님을 추대한다. 해방 후 교단이 왜색불교에서 벗어나 수행 교단을 위해 야심차게 추진해온 가야총림 건립과 그 첫 방장을 효봉 스님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효봉 스님은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당대 수좌들의 구심점이 되어 교단을 수행 교단으로 이끌어간다. 이후 효봉 스님은 통영 용화사, 미래사 등에서 제자들과 함께 철저히 수행중심으로 살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교단은 왜색불교를 없애기 위한 정화운동으로 소용돌이친다. 효봉 스님은 이런 정화운동에 청담, 동산 스님의 요청으로 참여하게 된다. 정화운동 이후 효봉 스님은 한국불교의 가장 큰 어른으로 상징되는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에 오르게 된다.
효봉 스님은 일제 식민지 시절과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과 정화운동 등 근현대 한국불교의 격동기를 통과한 전통 선 수행자이다. 개인으로는 보조지눌의 정혜쌍수라는 전통 선을 이어온 수행자이지만, 한편으로 가야총림 초대 방장, 정화운동의 참여, ‘통합종단 초대 종정’이라는 한국불교에 부여된 새로운 활로 모색에 그 책임을 부여받지 않을 수 없었다. 종정 추대 이후 동화사 금당선원에 주석하며 선지를 펼쳤고, 1966년 밀양 표충사에서 세수 79세 법납 42년에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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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948~1949
1. 1948년 7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해제 법어 2. 1948년 10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동안거 결제 법어 3. 1948년 12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 성도절 법어 4. 1949년 1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5. 1949년 3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6. 1949년 3월 25일 해인사 가야총림 7. 1949년 4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8. 1949년 4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결제 법어 9. 1949년 5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10. 1949년 6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반산림 법어 11. 1949년 6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12. 1949년 7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해제 법어 13. 1949년 8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14. 1949년 8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15. 1949년 9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16. 1949년 9월 10일 해인사 가야총림 - 가사불사架裟佛事 회향 법어 17. 1949년 10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동안거 결제 법어 18. 1949년 12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 동안거 반산림 법어 19. 1949년 12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 성도절成道節 법어
1950~1954
20. 1950년 1월 7일 해인사 가야총림 - 기신론산림起信論山林 회향 법어 21. 1950년 1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동안거 해제 법어 22. 1950년 2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열반재涅槃齋 법어 23. 1950년 3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24. 1950년 4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25. 1950년 4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결제 법어 26. 1950년 여름 해인사 가야총림 - 문성니재일文成尼齋日 법어 27. 1950년 5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28. 1953년 4월 15일 통영 용화사 토굴 - 하안거 결제 법어 29. 1953년 6월 1일 통영 용화사 토굴 - 하안거 반산림 시중示衆 30. 1954년 1월 15일 통영 용화사 토굴 - 동안거 해제 법어 31. 1954년 진주 연화사 32. 1954년 7월 24일 비구승比丘僧 대회차 상경중 선학원에서
1958~1960
33. 1958년 10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 동안거 결제 법어 34. 1958년 11월 1일 동화사 금당선원 35. 1958년 1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36. 1958년 12월 1일 동화사 금당선원 - 동안거 반산림 법어 37. 1959년 4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 하안거 결제 법어 38. 1959년 5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39. 1959년 6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40. 1959년 7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 하안거 해제 법어 41. 1959년 11월 1일 동화사 금당선원 42. 1959년 1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43. 1959년 11월 30일 동화사 금당선원 44. 1960년 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 동안거 해제 법어
6. 효봉 스님 이력
1888년 음력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출생 1900년 평양감사 개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 1908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하여 관선 유학시험 합격 1913년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 졸업 후 귀국 1914년 서울과 함흥, 평양 등에서 10년 동안 법관 생활 시작 1923년 판사를 벗어던지고 조실부모한 엿장수로 전국 방랑 1925년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38세) 1926년 용성 스님 및 수월 스님을 찾아가 운수행각雲水行脚 1927년 신계사 미륵암에서 용맹정진 1928년 신계사 보운암에서 용맹정진 1929년 금강산 여여원 선원에서 용맹정진 1930년 금강산 법기암 무문관 토굴에서 1일 1식 장좌불와 용맹정진 1931년 토굴 정진 1년 6개월 후 오도悟道(44세). 스님의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海底燕巢鹿抱卵 타는 불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火裡蛛室魚煎茶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此家消息誰能識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白雲西飛月東走 1932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화상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 수지 1933년 내금강 마하연 선원에서 만공 스님 회하會下에서 정진 1934년 남쪽으로 운수행각 1935년 설악산 봉정암에서 동산 스님, 청담 스님 등과 함께 하안거.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 회하에서 동안거 1936년 태백산 수암사에서 동산 스님, 혜암 스님 등과 함께 정진.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을 모시고 동안거 1937년 운수행각을 멈추고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 이때 구산 스님이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삼일암에서 출가 938년 보조국사의 16세 법손인 고봉국사로부터 몽중법어夢中法語를 듣고 난 후 법명을 학눌學訥, 법호를 효봉曉峰이라 함. 1941년 재단법인 여여원如如院 이사장 취임 1946년 가야산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개설하고 초대 방장으로 위촉(59세) 1950년 부산 동래 금정사에서 동안거 1951년 경남 통영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에서 하안거 1954년 미륵산 용화사 뒤편 미래사 창건 및 주석. 종단 정화준비위원으로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주석 1955년 미래사 토굴(曉峰臺)에서 오후불식午後不食하며 정진. 이때 법정 스님이 효봉 스님을 은사로 미래사에서 출가 1956년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 대회에한국 대표로 동산 스님, 청담 스님과 함께 참석 1957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해 종단의 종무행정을 수행. 이승만 대통령 생일 잔치에 초대되어 “본래 생사가 없는데 어디에 생일이 있겠느냐(生不生, 死不死)”는 유명한 일화를 남김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3대 종정으로 추대. 동화사 금당선원에 주석 1960년 미래사 토굴에 주석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추대(75세) 1963년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1966년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 주석. 음력 9월 2일 새벽 3시 입적. 세수 79세 법납 42년. 임종게는 아래와 같다. 내가 말한 모든 법吾說一切法 그거 다 군더더기都是早抭悊 오늘 일을 묻는가苦問今日事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月印於千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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