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의 은사2
삽화 정윤경
혜암은 사미계를 수계하자마자 구참 수좌들의 선방인 퇴설당에 방부를 들였다. 그러나 혜암은 사미승이었으므로 퇴설당 방부를 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퇴설당 대중들이 공사를 벌여 혜암의 입실을 반대했다. 입승을 보기로 한 우봉(愚鳳)이 조실스님인 효봉에게 따졌다.
“조실스님, 갓 계 받은 사미에게 퇴설당은 안 됩니다.”
해인사에 선방은 두 군데가 있었다. 신참이 드는 보통 정진실인 선방과 구참들이 가행정진하는 퇴설당이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 전통을 따른다면 혜암은 당연히 보통 정진실로 가야 했다. 그러나 혜암은 효봉을 찾아가 간청했다.
“가행정진을 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수좌들이 반대를 하니 좀 기다려 보거라.”
“오늘이 동안거 결제인데 기다릴 틈이 없습니다. 그냥 선방으로 들어가 없는 듯이 말석에 앉겠습니다.”
“인곡스님도 성관 수좌를 부탁했어.”
할 수 없이 효봉은 퇴설당 대중을 불러 다시 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효봉의 설득에도 대중들이 반대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신참이 퇴설당에 든 예가 없습니다.”
“성관 수좌는 사미지만 장좌불와를 해요. 거기다가 일일일식(一日一食)까지.”
“사미가 퇴설당에 입실하여 문제를 일으키면 어찌하실 겁니까.”
그러자 효봉이 방바닥에 주장자를 내리치며 역정을 냈다.
“공부하는데 신참, 구참이 어디 있는가. 여기 이 자리에 성관 수좌만큼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효봉이 큰소리를 내자 대중들은 아무 반박도 못했다. 혜암의 정진력은 이미 대중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설당의 전통을 지키자고 반대해 왔던 대중들은 납자의 태도를 가지고 따지는 효봉의 질책에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입실한 혜암은 일주일 단위로 화두를 들고 참선했다. 환적대 부근의 굴에서 엿새 동안 단식하며 정진한 경험도 힘이 됐다.
훗날 혜암은 조계종 종정이 되어 이때 이후의 참선 경험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 바 있다.
-일주일이 지나면 또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했지요. 일주일이면 견성한다고 하니까. 오직 일주일만 생각했어요. 일주일 동안 공부한 건 내버리고, 이주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일주일을 내세워 자꾸 하다 보니까 일 년이 간 줄 모르고, 저녁인지 낮인지 몰라요. 공부할 때는 저녁도 없고 낮도 없어요. 일체유심조라 하지 않습니까. 오직 공부하는 생각 하나밖에 없어요.
동안거를 마친 혜암은 인곡에게 불려갔다. 인곡은 마른 장작 타듯 외골수로 치닫는 혜암의 기질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심의 불길이 솟구쳐 순일할 때는 더 바랄 것이 없지만, 그것이 장애를 만나 꺼져 버린다면 큰 문제였다. 인곡은 자신의 경험상 재발심의 불씨를 다시 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재발심의 불씨를 살려내는 데는 부처님 말씀, 즉 불경을 방편으로 삼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요긴했다. 그래서 인곡은 상좌 혜암에게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講院)의 이력(履歷)을 보게 하고 싶었다.
인곡은 첫 안거를 무사히 마친 혜암에게 격려부터 했다.
“조실스님이 너의 정진력을 칭찬했어. 실제로는 어땠느냐.”
“일주일 지나면 태평양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했습니다.”
“장좌불와는 할 만한가.”
“허리가 아픈지, 다리가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인곡은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선방에서 첫 안거를 났으니 이제 강원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
“스님, 생사가 무상한데 어느 겨를에 강원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강원을 가라고 한 것은 참선공부를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게 된다면 어려울 때 도움이 되지 않겠나. 모르고는 발심이 안 되지. 아는 만큼 발심도 커진다는 얘기야.”
혜암은 상좌로서 스승의 권유를 아예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곡을 설득할 수 있는 방편을 냈다.
“스님, 조건이 있습니다.”
“무어냐.”
“제가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스님보다 먼저 죽었을 때는 좋습니다.”
“그때 경을 공부하겠다는 것이냐.”
“제가 죽은 뒤 환생하여 스님의 원력으로 경을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그때 하겠습니다.”
금생에는 무조건 참선공부를 하고, 다음 생에나 경을 공부하겠다는 혜암의 투지에 인곡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다음 안거는 어디로 갈 생각이냐.”
“오대산 상원사 선방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한암스님을 모시고 사는 것도 큰 복이지.”
인곡은 혜암을 붙잡지 않았다. 자비롭게 놓아 주었다. 그래서 인곡(麟谷)이 원래의 법호지만 스님의 어질고 자비로운 성정을 감안하여 인곡(仁谷)이라고도 했다.
혜암의 은사인 인곡.
스님의 법명과 속명은 창수(昌洙)이고, 고향은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 14세에 고창 문수사로 출가하여 금성(錦城) 화상을 은사로 수계하고, 19세까지 백양사에서 정진하고 20세에 금해(錦海)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아지녔다.
이후 팔공산 금당탑전에서 1백일 용맹정근 중에 꿈속에서 가사 한 벌을 받아 입으니 운수납자의 도인상(道人相)과 흡사했다. 꿈에서 깨어난 스님은 스스로 생각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의 설법(一代時敎)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처방(濟世之醫方)이기는 하지만 좋은 약(良藥)은 아니다.’
비로소 스님은 운수납자의 길을 떠났다. 예산 보덕선원에서 보월(寶月)선사의 지도를 받으며 안거했는데, 대중 가운데서 선기(禪機)가 으뜸이라는 평을 들었다. 스님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선사,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선사, 그리고 수월, 혜월 등의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고 도봉산 망월사로 가서 용성(龍城)선사를 뵀다. 그때 용성선사가 스님에게 물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스님은 주먹을 내밀며 답했다.
“이러한 물건이 이와 같이 왔습니다.”
“옳고 옳다.”
용성선사는 스님을 다시 보더니 크게 웃으면서 인곡당(麟谷堂)이라는 법호를 내려주고 게송을 읊조렸다.
어진 마음이 하늘과 땅에 두루 하니
깊은 골짜기 또한 밝고 밝음이로다.
온갖 조화가 이를 쫓아 일어나니
영원히 생멸하지 않음이로다.
仁心抱天地 玄谷又明明
造化從斯起 亘古不生滅
용성선사에게 법을 받은 스님은 32세에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되었다. 스님은 늘 선원 납자들에게 무자 화두를 주면서 당부하곤 했다.
“세상 전답은 식량을 수학하는 데 다함이 있지만 한 개의 무자 화두는 영겁의 양식이니라. 재미없음 가운데 재미있음은 하늘과 인간 세상에 으뜸가는 맛이니 무자 화두 맛을 선열식(禪悅食)으로 삼아라.”
스님은 양산 통도사 조실로 갔다가, 호남으로 건너가 나주 다보사 선원에서 우화(雨華), 고암, 전강선사 등과 함께 납자들을 지도하던 중에 해방이 되자 효봉과 더불어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해인사에 머물면서 하루는 법상에 올라 다음과 같이 일렀다.
“이 차 한 잔이 옛날 조주스님의 차와 같은가 다른가.”
대중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스님이 게송을 읊조렸다.
여기 한 잔의 조주차여
불조를 죽이고 살림이 자유롭도다.
푸른 하늘 밝은 날에 전광이 번쩍이니
산하대지가 무너져 티끌이 되도다.
於此趙州一盞茶 殺佛活祖總自在
靑天白日閃電光 山河大地磨爲塵
해방 직후 해인사 살림은 몹시 궁핍했다. 스님은 승속을 위해 장경각에서 천일기도를 했다. 승속의 옅어진 신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였다. 뜻을 함께 하는 대중과 천일기도를 하는 동안 떠났던 신도들이 돌아와 동참하고 기쁘게 보시를 했다. 스님은 승속뿐만 아니라 미물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미물에게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헌식(獻食)을 했다. 그러자 가야산 허공을 나는 까마귀들이 스님을 따랐다. 스님이 음식을 들고 나가면 까마귀들이 몰려와 스님의 머리와 어깨에 앉아 스님의 염불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까마귀들은 스님이 염불하는 동안에는 결코 먹이를 쪼아 먹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혜암은 상원사로 떠나기 전에 인곡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인곡이 간절하게 당부했다.
“지금 당장 죽는 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다. 가사 장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일임을 명심하라.”
“스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계행을 청정하게 잘 지키어 넓고 큰 인연을 닦아라. 선정을 닦아서 물러서지 아니하면 큰 광명이 널리 비칠 것이다.”
어디선가 매화향기가 퇴설당 담을 타고 넘어와 혜암의 코끝을 자극했다. 인곡도 향기를 맡고 있는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른 봄의 햇살이 방광하듯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혜암은 퇴설당을 나와 토방에 놓인 짚신을 신었다. 인곡이 밤새 엮어 만든 새 짚신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혜암은 인곡이 며칠 전에 빨아준 칼칼한 장삼을 입고 있었다. 혜암에게만 특별하게 짚신을 엮어주고 빨래를 해준 것은 아니었다. 인곡은 공부하는 수좌라면 누구라도 ‘화두가 보물’이라며 그렇게 돌봐주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