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의 출가2
삽화 정윤경
장성역에서 기차를 탄 남영은 이른 새벽에 대전역에서 내렸다. 대구역으로 가는 경부선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마침 경부선 완행열차가 기적소리를 내지르며 승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남영은 차표를 산 뒤 대구행 기차를 확인하고는 올라탔다. 기차는 이미 승객들로 통로까지 가득 차 있었다. 키가 작은 남영은 숨이 막혔다. 흰색 양복이 구겨지고 백구두가 밟혔다.
기차가 서너 정거장을 지난 뒤에야 먼동이 텄다. 동녘 하늘이 붉어지더니 푸른빛이 돌았다. 영동역에서는 장돌뱅이 승객들이 우르르 자루에서 감자 쏟아지듯 내렸다. 그제야 남영은 자리를 하나 잡고 앉았다. 좌석을 차지한 승객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았다. 남영은 쪽빛으로 변해가는 차창을 응시하며 또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본에 갔을 때부터 암호처럼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눈은 왜 두 개가 앞에만 있는 것일까.’
남영에게는 스스로 든 화두로써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답이 없는 의문이기 때문인지 한번 그 생각에 빠지면 깊이깊이 들어갔고, 눈덩이처럼 점점 커졌다. 어떤 날은 한나절을 그 생각으로 흘려보낸 적이 있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한나절이 한순간처럼 빨랐다.
남영은 혹시 눈이 하나인 애꾸눈이 있나 하고 살폈다. 그러나 옆에 앉은 아주머니도, 앞에 앉은 스님과 모자를 쓴 대학생도 모두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스님이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눈을 떴다. 남영은 스님에게 합장했다. 스님이 물었다.
“어디까지 가시오.”
“해인사로 갑니다.”
“스님은요.”
“나는 팔공산 파계사로 갑니다.”
남영은 마음속으로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자신과 행선지가 달랐다. 그러나 대구까지 이야기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남영은 스님에게 스스로 늘 의문을 품어 왔던 자신만의 화두를 물었다.
“스님, 눈은 왜 두 개가 앞에만 있는 것일까요.”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것이 답이었다. 답을 듣고자 했는데 오히려 남영에게 질문을 던진 셈이었다.
‘스님은 왜 주먹을 들어 보였을까.’
남영이 말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이번에는 스님이 물었다.
“거사님, 눈은 왜 두 개가 앞에만 있는 것일까요.”
“오른쪽은 옳은 것을 보고, 왼쪽은 그른 것을 보라는 뜻이 아닐까요.”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좌석에 앉아 눈을 붙이고 있던 아주머니와 대학생도 눈을 떴다. 남영이 대답을 못하고 있자, 스님이 대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이 한번 대답해 봐요.”
“한 번 볼 것을 또 한 번 더 보라는 뜻으로 눈이 두 개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눈이 세 개라면 세 번을 보라는 뜻이겠네.”
남영과 얘기할 때는 진지한 분위기였지만 학생과 얘기를 주고받을 때는 농담으로 변했다.
“학생, 입이 하나인 것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코는 하나인데 콧구멍이 두 개인 것은.”
“미련한 바보가 콧구멍 후벼 파다가 숨 막혀 죽을까 봐서요.”
남영도 소리 내어 웃고, 수심에 잠겨 있던 아주머니도 웃었다. 스님이 아주머니에게 말을 시켰다.
“보살님, 걱정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 업이려니 하고 웃고 사세요.”
“스님, 지는 눈이 있어 괴로워유. 남편이 바람 피는 것을 허구헌 날 이 두 눈으로 보고 사니깨유.”
“보살님, 두 눈으로 미워하는 것만 보지 마세요. 한쪽 눈은 사랑을 보는 데 쓰세요. 그러다 보면 미운 정 고운 정 들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남영은 스님이 아주머니의 고민을 들어주는 동안 다시 그 생각에 빠져들었다. 일단 그 생각에 빠지면 누가 옆에 있건 없건 상관없었다. 남영이 차창 밖에만 눈을 주고 있자, 스님은 더 이상 남영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기차는 기적소리를 터뜨리며 계속 남행했다. 차창 밖은 어느새 아침으로 변해 있었다. 철로 변에 핀 진달래꽃이 붉게 스쳤다. 진달래꽃의 잔상이 차창에 아롱거렸다. 농부들은 들판으로 나와 못자리를 만드느라 물을 대고 있었다. 차창 밖은 신록이 풋풋한 4월 초순의 봄이었다.
훗날 혜암은 이 무렵 자신만의 화두를 회상하며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시절 나로서는 강한 의문이었어. 눈은 왜 두 개가 앞에만 있는 걸까. 내게는 화두 비슷한 묘한 의문이었어. 일본불교는 형식에 치우쳐 있어 한국에서 출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지. 일본 임제종 절의 유나로 계시던 서옹 스님을 뵙고 <금경경> 한 권과 ‘참선하라’는 말씀을 얻은 뒤에 한국으로 왔지.
남영은 대구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야로면까지 왔다. 해인사를 가려면 야로면에서 하차하여 걸어야 했다. 당시만 해도 해인사까지 가는 버스가 없었다. 초봄이었으므로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들에는 소를 몰면서 논을 갈아 뒤엎는 농부도 보이고, 나물을 캐는 아낙네도 보였다.
야로면 면사무소에서 해인사까지는 30여 리 길이었다. 남영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해인사에 가면 도인들이 많다는데, 누구를 먼저 만날지 가슴이 설렜다. 해인사 도인 중에 남영이 알고 있는 도인은 해방 전에 판사 출신으로 출가하여 금강산에서 깨친 효봉(曉峰)이 있었다. 물론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일본에서 소문으로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백양사 노스님이 ‘해인사 도인’이라고 했던 분도 해인사 조실채에 주석하는 효봉일 터였다.
논에서 새참을 먹던 농부들이 남영을 불렀다. 논둑에 펼쳐 놓은 새참은 검은 보리쌀 밥에 고추장과 된장국이 전부였다. 남영은 시장했으므로 밥 한 그릇과 국 한 사발을 눈 깜짝할 사이에 비웠다. 한 농부가 남영을 보고는 말했다.
“시님 노릇 하러 가는 교.”
“그렇습니다.”
“시님들을 많이 봐서 압니데이. 행색만 봐도 좀 보인다 아입니꺼.”
“고맙습니다.”
“한 그릇 더 하시소. 배고플 때는 뭐니 뭐니 해도 밥이 관세음보살 아닌 교.”
남영은 두 눈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곤하던 눈이 밝아졌다. 새참 바구니에 담긴 밥이 달리 보였다. 거룩하고 따뜻하게 보였다. 관세음보살이 법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부들의 새참 바구니 안에도 있었다.
남영은 산길을 걸으면서 무릎을 쳤다.
‘아, 세상의 모든 것이 관세음보살님이구나!’
헐벗은 이에게는
옷 한 벌이 관세음보살.
배고픈 이에게는
밥 한 그릇이 관세음보살.
잠잘 데 없는 이에게는
방 한 칸이 관세음보살.
홍류동 초입에 이르자 해인사로 가는 스님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낙락장송 너머로 바랑을 메고 가는 스님들의 뒷모습에 남영은 넋을 잃었다. 세상을 초탈한 대장부의 기상이 느껴졌다. 홍류동 바위 사이로 무심히 흐르는 계곡물처럼 스님들의 자재한 걸음걸이도 걸림이 없었다. 남영은 뛰다시피 걸어 바랑을 메고 가는 스님을 불렀다.
“스님.”
솔숲 산길을 사뿐사뿐 걷던 스님이 뒤돌아보자 남영이 말했다.
“스님, 저도 해인사로 갑니다.”
“어서 오시오.”
“해인사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초행길이군요. 한 십 리 더 가야 합니다.”
산길에는 낙엽이 된 솔잎이 뒤덮고 있었다. 누런 솔잎을 밟을 때마다 솔향기가 솟구쳐 코끝을 적셨다. 그런가 하면 솔바람 소리는 귀를 맑혔다.
“해인사 스님이십니까.”
“아니오. 난 수원 용주사 스님이오. 이번 여름을 해인사에 나려고 방부 들이러 가는 길이오.”
“스님, 저도 해인사에서 살러 갑니다.”
“중이 되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겉보기에는 속세에서 공부할 사람 같습니다만.”
“도인 되는 것이 진짜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소만 해인사는 행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절로 유명합니다.”
스님의 말에 남영은 낙심했다. 아무나 행자로 들이지 않는다는 말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남영은 물러서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무엇이든 한 번 결심하면 바꾸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남영은 용주사 스님에게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남영은 해인사에서 받아 줄 것으로 낙관했다. 남영의 낙관 속에는 어떤 믿음이 있었다. 마음을 다하면 하늘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일이 꼬일 때마다 남영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을 떠올렸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