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경멸하다 비구니가 된 왕비 ‘케마’⓶
케마는 자신의 교만을 참회하고 붉은 연꽃 같은 부처님의 두 발 앞에 깊이 머리를 숙였다. 지난 삶에 대한 참회와 새로운 삶에 대한 발원이 그녀에게서 샘물처럼 솟구쳐 올랐다. 죽림정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오랜 전생부터 쌓아온 공덕의 힘으로 그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순간 이미 성자의 흐름에 들었던 것이다. 저만치 보이는 왕궁의 모습이 그녀에게 낯설게 다가왔다. 왕궁으로 돌아온 케마는 마치 처음 왕궁에 온 사람처럼 손님의 발걸음으로 조심조심 걸어 남편 빔비사라 왕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 허락하시면 저는 이제 부처님의 상가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수행자의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왕비의 예전 같지 않은 모습과 예상치 못했던 요청에 크게 놀란 빔비사라 왕은 왕좌에서 내려와 왕비의 손을 잡았다. 어제까지도 철부지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대신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언성을 높이던, 도도하기 짝이 없던 왕비 케마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녀가 오늘은 하녀처럼 고개를 숙이고 낮은 소리로 말하고 있으니 의아한 것은 당연했다. 빔비사라 왕은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배경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왕비, 웰루와나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케마는 죽림정사를 찾아가 겪었던 일을 빔비사라 왕에게 자세히 전했다. 그런 뒤 다시금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는 저의 주인이십니다. 주인께서 허락하시면 저는 부처님의 상가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수행자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케마여, 당신의 출가를 허락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요청이었기에 왕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빔비사라 왕은 비틀거리며 왕좌로 돌아가 앉은 채 말없이 눈을 감았다. 부처님께 귀의하라고 웰루와나로 보낸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왕비가 자신의 곁을 아주 떠나는 일이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류를 하고도 싶었지만 케마의 눈빛과 몸짓은 이미 이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미 성자의 흐름에 든 그녀를 왕궁에 붙잡아 놓은 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그녀에게 수행의 길을 허락함으로써 고귀한 길을 걷도록 해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빔비사라 왕이 대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마여, 나는 당신의 출가를 허락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비구니가 되는 일을 내가 준비하겠습니다.”
출가를 하는 날, 빔비사라 왕은 사랑하고 아끼던 케마 왕비를, 황금으로 장식한 가마에 태우고 음악을 연주하며 라자가하 시의 거리를 돌았다. 꽃과 향을 뿌리며 환호하는 백성들의 열렬한 축복 속에 케마 왕비는 비구니들이 머무는 승원으로 향했다. 케마는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후 가사를 걸쳤다. 그리고 다시 비구 승단을 찾아가 출가를 허락 받는 절차를 마쳤다.
테라와다불교권에서의 출가의식 장면.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출가의식, 포살 등 계와 관련된 의식은 모두 시마홀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에서 거행된다.(사진 이학종)
영특했던 그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배어들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궁극적 목적지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포살을 하던 중이었다. 케마는 눈앞에 등잔불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계속했다. 케마는 이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며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놀라운 경지가 주는 즐거움을 신속하게 이루어낸 케마는 그 즉시 열반을 체험했고, 열반의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미세한 번뇌까지도 모조리 부수어버린 케마는, 마침내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제시한 최고의 경지 아라한이 되었다. 그녀가 출가한 지 불과 15일째 되던 날이었다.
수행과 교리, 두 가지 분야에서 모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케마의 경지는 수행력 높은 비구들조차 당해낼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케마의 높은 경지가 상가 내에 알려지면서 비구들은 케마가 머물고 있는 수행처로 교계하러 가는 것을 꺼렸다. 또한 설사 길에서 케마와 마주쳐도 에둘러 피하기 일쑤였다.
케마와 교리적 문답을 나눈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과 나눈 대화에서 들었던 가르침과 그녀의 대답이 단 한 구절의 차이도 없다는 점에 크게 놀랐다. 이 일이 있은 후 빠세나디 왕은 케마가 성취한 위대한 경지와 빼어난 설법 능력에 감동해 최상의 예로써 경의를 표했다. 케마는 부처님으로부터 ‘광대한 지혜를 갖춘 여성 출가자 가운데 제일’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그녀의 명성이 상가 안팎에 퍼져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그녀는 수많은 여성 수행자와 우바이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강대국의 왕비라는 고귀한 출신의 여인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후 부처님의 상가를 찾는 여성 수행자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빠삐만이여, 그대는 패배했다”
어느 날 대낮, 장로니 케마가 뜨거운 햇볕을 피해 한 나무 밑에서 앉아 있었다. 이때 악마 빠삐만이 다가와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라고 유혹하면서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당신은 젊고 아름답고
나 역시 젊고 청춘이니,
다섯 종류의 악기로
케마여, 오시오. 즐겨봅시다.
한쪽이 가죽으로 된 북, 양면이 가죽으로 덮인 드럼, 비파와 같은 가죽으로 덮인 머리에 줄로 묶여 있는 현악기, 피리나 소라 고동이나 나팔과 같은 관악기, 징이나 심벌즈, 탬버린과 같은 악기 등을 거론하며 케마에게 욕망을 부추겨보려는 빠삐만의 유혹이었다. 그러나 케마는 빠삐만의 유혹에 털끝만 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외려 그 게송을 듣고는, 아라한을 성취한 수행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일체의 현상에 물들지 않는다는 사실과, 존재와 자아에 집착하는 중생이 갖고 있는 완고한 경향에 대한 위험성을 밝히고, 해야 할 일을 다 해마친 자신의 경지는 당당하게 밝히는 다섯 편의 시를 읊었다.
이 병들고 파괴되고
부패되는 육신에
나는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는 제거되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창칼과 같고,
존재의 다발은 그 형틀과 같다.
감각적 욕망의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
이제 나에게는 불쾌한 것이다.
모든 곳에서 환락은 파괴되고
어둠의 다발은 부수어졌으니,
악마여, 이와 같이 알라.
사신(死神)이여, 그대는 패배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대들은
별자리에 예경하고 숲속에서 화신을 섬기며,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청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올바른 님,
사람 가운데 위없는 님께 귀의하여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스승의 교법이 참으로 실현되었다.
- 전재성 옮김
비구들의 상가를 이끄는 상수제자로 지혜제일 사리뿟따가 있다면, 비구니들의 상가를 이끄는 상수제자로 지혜제일 케마 장로니가 있었다. 이런 케마 장로니에 대한 부처님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다. 부처님께서 깃자꾸따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초경이 지난 후 삭까 천왕이 천신들을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부처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부처님 앞에 앉아서 법문을 들으며 고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이때 케마 장로니가 자신의 거처에 앉아 있다가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공중으로 날아서 부처님이 머물고 있는 깃자꾸따로 다가갔다. 그러나 케마는 삭까 천왕이 먼저 부처님의 처소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공중에서 살펴보고는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되돌아갔다. 이 신이한 광경을 지켜본 삭까 천왕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 다가와서 공중에서 삼배만 하고 되돌아간 저 비구니는 누굽니까?”
“천왕이여, 그는 나의 딸 케마입니다. 그는 도와 도 아님을 잘 아는 지혜제일의 비구니입니다.”
부처님은 케마가 ‘이것은 악처로 가는 길이고, 이것은 선처로 가는 길이고, 이것은 열반으로 가는 길이고, 이것은 길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아는, 즉 길과 길 아닌 것을 구별하는 능숙한 경지에 오른 최고의 비구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은 게송으로써 거듭 케마가 성취한 최고의 경지를 인정했다.
지혜가 깊어 현명하고
바른길과 그른 길을 잘 알고
구경의 목표에 도달한 사람,
그를 일컬어 아라한이라 한다.
- 전재성 옮김
테라와다불교권에서의 출가의식 장면.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출가의식, 포살 등 계와 관련된 의식은 모두 시마홀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에서 거행된다.(사진 이학종)
왕실의 공주로 태어나 부족함이 없었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미모까지 갖춰 강대국의 왕비까지 된 여인 케마. 이런 조건에서 그녀가 아름다운 미모와 권력, 부에 대한 애착을 모두 끊어낸 것은 매우 힘겨운 결단이었다. 도도하고 영특했던 그녀는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무상의 진리를 깨닫고 헛된 집착을 벗어던지는 용기를 실현한 위대한 여성 수행자였다. 모든 것을 손에 쥐었던 여인의 버림이기에, 그녀의 출가는 더욱 위대한 결단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듬고 다듬으며 감추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추하게 늙어 가는 육체, 또 언젠가는 형체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질 권력과 부(富). 그 허망함을 알면서도 이것들에게 가차 없이 버림받기 전까지는, 아니 버림받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좀처럼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 대다수 인간들이 걸어가는 행로였다. 그러나 케마는 이런 모든 것들의 허망한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본 순간 한 점의 미련도 없이 모든 애착을 벗어던졌다. 케마의 위대한 포기는 출가 후 그녀가 사리뿟따에 견줄 만큼 최고의 지혜를 갖춘 비구니가 되게 한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