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의 출가1
부처님 <팔상록>이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처님 8대 인연이야기>이다. 그런데 고승들에게도 8대인 인연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자면 출가, 발심, 수행, 고행, 오도, 전법, 제도, 열반 등의 감동적인 과정이 있는 것이다. 고승소설 전문작가인 정찬주 소설가에 의해서 지장, 경허, 만해, 성철, 법정, 일타, 혜암 등등 <고승 8대 인연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삽화는 정윤경 일러스트레이터가 맡는다. -편집자
삽화 정윤경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일본에 가 있던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관부연락선을 타고 귀국했다. 남영도 26세의 청년이 되어 관부연락선을 탔다. 누가 보더라도 남영은 멋을 한껏 낸 청년신사였다. 그는 흰 양복 상하의에 가을 햇살을 받아 번들거리는 백구두를 신고 있었다. 남영은 귀국하는 승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중절모를 손에 든 점잖은 신사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유학생 같구먼.”
“견문을 넓히고자 일본으로 떠났습니다만.”
“공부하는 목적도 그런 게 아닌가.”
중년신사는 남영을 유학생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조선인 출신의 교토대학 교수였다. 그도 역시 교수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귀국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영은 중년신사의 신분을 알고는 자신의 속마음을 조금 드러냈다.
“일본에서 얻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얻었는가.”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이 조국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고자 하는 길이라니.”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길을 가지요. 하지만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제가 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하하하. 세속의 욕망을 초월한 길을 가겠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저는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중년신사는 남영에게 호감이 가는지 자꾸 질문을 던졌다.
“일본에서는 무슨 공부를 했는가.”
“무슨 신기술을 배우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고 옳은 삶인지 그것이 알고 싶어 일본어로 된 여러 서적을 읽었습니다.”
“철학에 관심이 많았겠군.”
“동양철학 중에서도 불교서적을 많이 탐독했습니다.”
“사숙했던 선서(禪書)가 있다면.”
“<선관책진(禪關策進)>을 보고 느낀 바가 컸습니다.”
<선관책진>이란 명나라 말기에 운서 주굉(雲棲 株宏)선사가 60여 명의 선사들이 실제로 참구하고 깨친 경지를 모아 편찬한 선(禪)의 입문서를 말했다. 남영의 의지는 확고했다. 귀국하면 부모에게 인사드린 뒤 곧 출가하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남영이 가고자 하는 길은 입산 출가의 길이었다.
중년신사는 더 질문할 것이 없는지 침묵했다. 남영은 뱃머리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았다. 배는 크고 작은 파도를 가르며 부산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대해로 들어섰는지 검푸른 파도가 높게 일었다. 구름처럼 몸집이 큰 파도들이 연달아 배를 밀어붙였다. 파도가 하얗게 갑판을 타고 넘기도 했다. 선장의 지시에 따라 승객들은 모두 객실로 들어갔다.
승객을 가득 태운 배는 목적지를 향해 쉬지 않고 항해했다. 남영은 3등 객실에 앉아 자신의 결심을 다졌다. 한번 정해놓은 길을 바꾸지 않고 가는, 아무리 큰 파도가 가로막더라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바다를 건너가는 배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남영은 선장의 지시를 무시하고 뱃전으로 나갔다. 파도는 여전히 무섭게 달려들었다. 남영은 일본 임제종의 고승 일휴(一休)선사와 몰락한 남조(南朝) 왕후였던 선사의 모친이 남긴 유언서를 떠올렸다. 일본 고승전집을 읽던 중 일휴선사 편에서 선사의 모친 유언서를 읽고는 도 닦을 마음이 간절해져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을 굶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사바세계의 인연이 다하여 무위(無爲)의 부처님 나라로 돌아가려 한다. 바라건대 너는 속히 출가승이 되어 너의 불성(佛性)을 밝게 깨닫도록 하라. 그리하면 너는 장차 내가 지옥으로 떨어졌는지, 아니면 영원히 너와 함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대장부라면 불조(佛祖)가 다 너의 심부름꾼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책을 내려놓고 나가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 부처님께서 사십구년 설법하고서 단 한 자도 설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너는 응당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알아야 할 것을 안다면 무익한 망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몸으로
9월 1일
추기;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을 깨닫기 위한 것이다. 만약 네가 어떤 방편설만 의지한다면 너는 단지 한 마리의 무지한 벌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팔만 장경을 다 외우고도 자성(自性)을 보지 못한다면 너는 이 편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유언이다.>
남영은 이를 악물었다. 일휴선사의 모친이 환생하여 자신에게 당부하는 말 같았다. 일본의 한 자취방에서 일휴선사의 모친 유언서를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발심이 울컥 솟구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생을 무지한 벌레처럼 살지 않으려면 자성을 보고 깨달으라는 일휴선사 모친의 당부가 또다시 남영의 심혼(心魂)에 불을 붙였다.
남영이 가고자 하는 길은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니었다. 그러니 경전은 물론 동서양의 어떤 철학 서적 속에도 그 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떤 성인이나 위인도 답해 줄 수 없는 자성(自性)을 보고 닦는 길이었다. 다만, 그 길의 방향을 암시해주는 게송 하나가 남영의 가슴속에 말뚝처럼 박혀 있을 뿐이었다. <선관책진> 책장을 넘기면서 무심코 보았던 게송이었다.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 하였네.
펼치면 한 글자도 없으되
항상 큰 광명을 놓고 있도다.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게송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남영이 입산 출가하여 깨닫고자 하는 구경(究竟)이었다.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마음의 경전, 펼치면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발하고 있는 자성-, 말하자면 남영의 출가란 그것을 보고 닦고자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남영은 고향에 도착한 날부터 자신을 붙잡으려는 부모와 부딪쳤다. 예전에 살던 집보다 마당이 두 배나 넓고, 공동우물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집을 한 채 사드렸지만 남영의 부모는 남영에게 원하는 것이 따로 있었다. 남영을 서둘러 결혼시키려고 했다.
남영은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대나무 잎들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는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서옹(西翁)선사에게 받은 <금강경>을 읽으며 번민하는 마음을 비질했다. 남영이 교토에 머물고 있을 때 서옹은 이미 출가승이 돼 있었고, 임제종 계통의 일본 절에서 유나(維那) 소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영은 부모의 강권으로 두 번이나 선을 보았지만 출가하려는 마음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처녀를 구하러 다녔다. 남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난감했다. 선을 본 처녀의 부모를 실망시키는 일도 못할 짓이었고, 처녀의 혼인길을 애꿎게 막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남영은 부모가 받아들여 줄 수 없는 우스꽝스런 꾀를 냈다.
“어머님, 비구니스님이라면 결혼하겠습니다.”
남영의 말에 어머니가 반색하며 물었다.
“어디에 사는 비구니스님이냐.”
“백양사 암자에 있습니다.”
부모는 반가운 마음에 바로 백양사로 달려갔다. 그러나 남영과 결혼할 비구니스님은 백양사 어디에도 없었다. 백양사 비구니스님들이 크게 소리 내어 웃는 바람에 창피만 당했다. 마침내 부모는 남영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는 몹시 낙심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남영은 마음이 상한 부모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출가하겠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남영을 어르고 달랬다.
“결혼한 뒤에 출가하면 안되겠느냐. 백양사를 가보니 결혼한 뒤 스님이 되신 분들이 많더라.”
“그럴 생각이었다면 일본에서 출가했을 것입니다. 결혼한 일인(日人) 스님들도 참선 공부는 역시 우리나라 절에서 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것입니다. 해방 전해에 귀국하신 서옹스님도 <금강경> 한 권을 주시면서 참선하라고 권했습니다.”
부모는 더 이상 남영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못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그날 밤 이후 어떤 대사가 남영을 업고 가는 꿈을 세 번이나 꾸었다.
“여보, 아무래도 남영이가 스님이 될 것 같아요. 어떤 대사가 남영이를 업고 가는 꿈을 세 번이나 꾸었어요.”
“아무래도 남영이가 스님이 될 인연인 것 같소. 그러니 우리가 더 이상 남영이를 붙잡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남영은 부모에게 출가를 허락받고는 백양사로 올라갔다. 한 스님이 법당에서 염불을 끝내고 나오면서 얼굴이 상기된 남영을 맞이했다. 남영은 스님에게 다가서서 합장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스님이 되려고 왔습니다.”
스님은 남영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흰색 양복을 깔끔하게 입은 남영을 반겼다.
“잘 생각했다. 왜 중이 되려고 하느냐.”
“남의 처녀 망치지 않으려다 보니 일이 이리 됐습니다.”
“그래서 중이 되고 싶다는 말이냐.”
“참선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머리를 깎아주마. 내 상좌 해라.”
그러나 며칠 후, 남영은 대처승 일봉(一峰)에게 실망했다. 자신에게 계를 준 일봉은 절골에 마누라와 자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남영은 한 노스님을 붙들고 ‘우리나라에서 도 닦기에 어느 곳이 가장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스님은 ‘해인사에 도인이 있지.’ 하고 대답했다.
남영은 일봉이 자신의 머리를 깎아 주기로 한 날 미련 없이 해인사로 도망쳤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