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그릇된 인식이 한국불교계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부처님 재세 당시에 여성으로서 부처님과 동등한 경지에 오른 성자(성인, 아리아)들이 많았다. <미디어붓다>가 여성으로 태어나 온갖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부처님의 상가에서 부처님의 지도를 받아 성자의 흐름에 들었던 30여 여성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기획한 이유다. 집필은 최근 <붓다 연대기>를 펴낸 이학종 작가가 맡는다. 편집자 주
연재를 시작하며
부처님의 상가(Sanga, 승가)에는 여성 출가수행자(비구니)들도 있었다. 부처님의 상가에 여성 출가자가 포함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매우 경이로운 일이었다. 세계 주요 종교들이 21세기 현재에도 여성의 사제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 전, 부처님이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고, 남성 출가자들과 동등하게 대한 것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 재세 당시 인도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열악했다. 따라서 부처님이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결단이라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오랜 기간 곁에서 보좌했던 제자 아난다의 ‘의미 있는’ 항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난다는 여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던 부처님에게 “(스승께서는) 여성도 얼마든지 아라한과(열반을 성취한 성자)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어째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라는 취지로 따지며 거듭 간청해 끝내 여성의 출가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사실 아난다의 항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언급한 ‘수행의 진척에 있어 남녀의 차이는 없다.’는 원칙적인 입장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서기 5세기경에 설립된 나란다 대학의 유적 가운데 있는 이 스투파는 3세기에 아소카가 부처의 제자인 사리푸트라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 나란다 대학은 세계 최초의 주거대학으로 2천 명의 교사들이 만 명 이상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탑은 7개의 부속 건물로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층계참과 화려한 조형물들이 있다. 모퉁이 방들과 이웃한 부도에는 보살, 붓다 등 부처의 중요한 사건들이 묘사되어 있다.
여성의 출가가 허용된 후 부처님의 여성 제자들 가운데 실제로 많은 수가 성자(Ariya)의 지위에 올랐다. 성자의 경지 중에 최고의 지위에 해당하는 아라한과를 증득(證得) 한 여성 수행자들도 많았다. 아라한은 완전한 성인(聖人) 또는 최고 경지에 오른 성자(聖者)를 일컫는 것으로, 불교적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성 아라한의 출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불교계 안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부처님과는 달리, 부처님 이후 불교 교단의 지도자들은 여성 출가자들을 차별했고, 애써 여성 출가자들을 교단의 전면에 내세우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도리어 그들은 부처님께서 당시의 여건상 불가피했던 여성 출가자의 허용 조건, 즉 ‘여덟 가지 공경의 원리(八敬法)’를 비구니를 차별하는 근거로 악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가 내에서의 여성 출가자에 대한 차별행위는 여덟 가지 공경의 원리가 신체적 다름 등 여성 출가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당시의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만연했던 차별성을 지양하려는 실천적 노력 위에 정립된 규율이었다는 것을 외면한 데서 비롯됐다.
다 아는 것처럼 아라한과는 반야바라밀의 완성을 통해 열반을 증득함으로써 생사윤회로부터 완전히 해탈한 최고의 경지를 의미한다. 부처님이 열반을 성취한 후 사르나트에서 다섯 명의 고행 도반들에게 첫 설법을 해 이들이 차례로 아라한과를 얻은 직후 ‘여기 (부처님을 포함한) 여섯 아라한이 있다’고 선언한 것은 아라한과의 성취가 부처님이 지향한 궁극의 경지임을 알게 한다. 따라서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성인(성자)가 되었다’, ‘부처가 되었다(成佛)’가 될 것이다.
성자가 된 여성 수행자들은 최고의 경지를 증득한 후 자신의 심경을 시(詩)로 읊었다. 이는 마치 선가(禪家)의 수행자들이 개안(開眼)의 경지에 이른 후 읊었던 오도송(悟道頌)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초기불교 여성 수행자들의 시들은 선가의 오도송처럼 주로 깨침의 즐거움을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일체의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수행의 결과로 얻은 궁극적인 경지나 감흥을 진솔하게 한 편의 시로써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략하게 정리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비롯하여 연기법(緣起法),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37助道品] 등의 초기불교 교설들과 부정관(不淨觀), 자애관(慈愛觀), 무상관(無常觀) 등의 초기불교 수행체계들이, 단순히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더 큰 고뇌를 겪어야 했던 여성 수행자 특유의 치열한 삶과 어우러져 투영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 여성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결단으로 상가의 일원이 되어 당당하게 수행자의 삶을 걸을 수 있었지만, 남성 수행자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수행환경에 놓여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열악한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물리적인 위해와 겁박 등 온갖 시련에 부딪혀야만 했다. 이처럼 모진 질곡을 헤치고 성자가 된 여성 수행자들의 삶은 그래서 더 감동적이고, 절절하게 피부에 와닿는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비구니, 즉 여성 수행자들은 ‘세계 최초의 여성 철학자들의 출현’이라고도 일컬어진다. 1~2세기 경 시리아 왕의 대사였던 메가스테네스는 소아시아를 다스리던 셀레우코스 1세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찬드라굽타에게 보낸 사절단에 끼어 인도를 방문했을 때, 일단의 비구니들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란 일이 있었다. 그는 이때의 놀라운 경험을 <인도지(印度誌), Indica>에 남겼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 남성 철학자들과 겨루어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
메가스테네스의 이 기록으로 당시 부처님의 상가에서 비구니들의 위상과 활약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비구니들이 비구들과 법에 대해 당당하게 겨루고, 논의를 펼쳤다는 것은, 여성의 인권이 역사상 가장 고양된 시기인 오늘날의 불교 교단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여성 수행자들이 남긴 시들에는 남성 수행자들의 그것에 비교해서 내적인 성찰을 담은 내용이 많다. 이는 여성 수행자들에게 더 어려웠던 당시의 수행 환경 때문이겠지만, 여성만이 갖는 독특한 성정, 즉 여성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여성성의 표출이 수행력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오히려 섬세하고 유연한 표현으로 자신이 이루어낸 경지를 표현해냄으로써 그 감동과 공감의 격을 높게 하고 있기도 하다.
나란다 대학 유적 부분
부처님에 의해 설립되고 고따미에 의해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된 여성 출가수행자들, 즉 비구니들은 저마다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이 처한 암울한 상황을 변혁시키는 창의성과 진취적 기상을 발휘했다. 여성 수행자들의 용기와 열정은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여성에게 드리운 온갖 장애와 편견을 극복하고 도덕적‧정신적인 문제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여성 수행자들이 성취한 열반의 노래들을 집대성한 문헌이 <테리가타(장로니게경)>이다. <테리가타>는 전재성 박사에 의해 최근 번역 출간되었다. 따라서 이번 기획연재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테리가타>(한국빠알리성전협회 펴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또한 <법구경 주석서>를 번역해 펴낸 무념·응진 스님의 <법구경 이야기>(옛길 펴냄) 등도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