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자국에 꽃이 피어나려면
정찬주(소설가)
일러스트 정윤경
십여 년 전, 내 나이 오십대쯤의 일이다.
새벽마다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 터까지 대숲길을 산책하곤 했다.
산책길에서는 대나무 향기 같은 좋은 인연이나 기억들만 떠올랐다.
철감선사와 나 사이에 무슨 선연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형사제간인 조주선사와 철감선사 두 분의 진영이 봉안된
호성전(護聖殿) 안내문은 내가 중국 자료를 구한 뒤 작성한 글이다.
나만이 갖는 오롯한 정복(淨福), 맑은 행운이었다.
붉은 꽃무릇이 지고 난 자리에 야생 차꽃향기가 부도를 감싼
겨울에는 유난히 대학교 불교학생회 시절이 많이 생각났다.
누구라도 젊은 날은 푸르른 찻잎처럼 풋풋했을 터이다.
그 시절에 저지른 실수는 슬그머니 미소거리가 되기도 한다.
참회하는 공간이고 시간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내와 함께 새벽이슬에 신발을 적시며
부도 터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서 속마음으로 참회했다.
‘전생에 지은 빚을 갚겠습니다.’
‘지은 허물을 참회합니다.’
아내도 모르는 나만의 참회바라밀인데, 참회를 무심코 하다 보면
내 발자국에도 꽃이 피어날 성만 싶었던 것이다.
향기를 공양하는 부처를 향적여래(香積如來)라 했던가?
그렇다. 내 둘레에서 향기가 나게 하려면 참회밖에 없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인디언처럼.
108참회를 평생해온 암자의 노승을 뵌 적이 있다.
여름인데도 덕지덕지 기운 겨울철 누더기 장삼을 입고 계셨다.
나는 그분의 몸과 누더기장삼에서 법향(法香)을 맡았던 것이다.
공(空)을 보았다고 해서 중생이 바로 부처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쌓은 허물은 어찌할 것인가, 차고 넘치는 업(業)은 어찌할 것인가?
고체처럼 달라붙은 업장(業障)을 어떻게 맑히고 씻어낼 수 있을까.
부처님도 5백 생 동안 맑은 선업으로 닦고 또 닦았다 하지 않은가.
나 같이 허물 많은 중생으로서는 오온개공을 깨달았다고 해서
도일체고액, 즉 모든 괴로움과 불행에서 벗어날 리 없을 터.
바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인과를 외면한 염치없는 짓,
내 못남을 늘 살피고 받아들이면서 오직 참회하면서 살아야 하리.
끝없이 참회하고 맑은 선업을 지어 언행에서 향기가 나야 하리.
모든 언론에서 하버드 대학원을 나온 어떤 스님을 비난하고 있다.
그동안 방송에서 쌓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추락해버렸다.
그러나 인(因, 씨앗)이 있으니 과(果, 열매)가 생기지 않았겠는가.
스님은 소낙비 같은 비난을 피하지 말고 달게 받아야 한다.
달마는 인연을 따르는 수연행(隨緣行)을 최고의 수행이라고 했다.
인과가 얼마나 엄정하고 또 수학처럼 분명하고 엄밀한 것이냐면
비탈진 밭에서 자란 사과는 그 모양도 밭을 닮아간다고 한다.
오래전에 입적하신 직지사 관응 조실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나는 스님과 중국 오대산을 10여 일 동안 함께 순례한 적이 있다.
순례 중에 자연스럽게 스님의 여러 가지 면이 보였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감상하는 색다른 모습,
어느 절에서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 보시하는 행동 등등.
풋풋한 신세대 젊은 스님이군, 그런 느낌을 받았다.
스님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불교를 대중화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시는구나 싶어 마음속으로 성원했다.
그러나 솔직히 스님의 글에는 묵직한 오의(奧義)는 없었다.
지식이 풍부한 카운슬러의 재치 있는 언사라고나 할까.
그 이상은 내가 뭐라고 경솔하게 평하기에는 부적절했다.
남의 지식과 자신이 깨달은 지혜의 차이를 알면서도
대중친화적인 글을 쓰고 TV에서 대중을 열광시키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수행자로서의 스님보다는 스님의 역할을 옹호했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지나간 얘기지만
내 전생은 사찰 안팎을 드나들며 강의하는 법사였다고 한다.
원래는 화랑이었는데 신라가 망하자 만주로 올라가서
사냥을 직업 삼아 호랑이나 노루를 살생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을 탐독하고 난 뒤,
크게 뉘우친 바가 있어 법사가 됐다는 것이었다.
동국대 국문과를 다니던 대학시절 불교학과 학생인 듯
불교학자 이기영 박사님의 <대승기신론> 연재물을 찾아서 보고
외웠던 적이 있는데, 모 도사의 말이 신통방통하기도 했다.
그 도사는 내 산방에서 아내와 내 전생을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전생에 나는 공부하지 않는 스님들을 맹비난하고 다녔다고 한다.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그 업을 씻기 위해서라고 도사는 진단했다.
실제로 나는 누구보다 많은 구도소설을 발표한 것도 사실이다.
3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성철 스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
법정 스님 일대기 <소설 무소유> 만해 한용운 스님 일대기 <만행>,
일타 스님 일대기 <인연> 경봉 스님 일대기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김지장 스님 일대기 <천년 후 돌아가리>등을 발표해 왔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지만 부처님은 제자들 사이에서
시비가 일 때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셨다는 일화를 많이 남기고 있다.
시비를 넘어서 어리석은 이들이 찾아오면 다독거리듯 설법하고
세상의 모든 허물을 씻고자 치열한 정진과 참회를 하셨던 것이다.
나는 언론이 기사 거리인 양 화살을 쏘아대는 스님의 위기 사태에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은 물로 바뀌게 될 때까지 침묵하고 싶다.
남을 비난하고 탓하는,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을 보태고 싶지 않다.
도자기가 1천도 이상의 불구덩이 가마 속에서 스스로 환골탈태하듯
스님 또한 법당 마루에 이마를 찧으며 뜨겁게 참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침 일찍 아랫마을에 사는 부부가 새로 담근 김치 한 통을
가지고 올라온 모양이다. 해마다 김치를 선물하시는 분이다.
김장 배추는 수액이 뿌리로 다 내려간 뒤의 것이 아삭아삭 식감이 좋단다.
그래서 동짓날 전후에 다른 분보다 김장을 늦게 한다고 말한다.
배추가 수액을 뿌리로 내려보내는 까닭은 동면을 위해서일 것이다.
잎이 얼지 않고 한겨울을 나기 위한 본능적인 생존법일 텐데
배추도 지혜로운 이같이 자신을 비울 줄 아는가 싶다.
배추뿐만 아니라 산중의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김치를 가져온 부부에게 아직 개봉하지 않은 유자차를 선물한다.
무엇이든 귀한 산중에서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진다.
송광사 수련원장 현묵 스님께서 내게 주신 유자차인데
진짜 주인은 김치를 내게 선물한 아랫마을 부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