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재보살은 ‘또 다른 나’
정찬주(소설가)
일러스트 정윤경
반려견 ‘행운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시간이 좋다.
두루미 한 마리가 나는 저수지까지 오리 길을 다녀오면
등에 땀이 나지만 선득선득 불어오는 소슬바람이 식혀준다.
도반인 아내와 함께 하니 무소의 뿔처럼 지루하지 않다.
요즘은 논에서는 벼가 익어가고 있다.
향기 향(香) 자는 벼 화(禾) 자와 날 일(日) 자가 결합된 글자이다.
날마다 가을볕을 쬐면서 벼가 익으니 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벼 향기를 맡으면서 산책하는 것도 내게는 축복이다.
<반야심경>의 주인공인 관자재보살이야말로
발복을 온전하게 실천해온 보살이 아닐까 싶다.
영원한 행복을 의인화시킨 만고의 화신(化身)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산방의 조그만 서재, 석양빛이 스미는 창호 밑에
중국에서 모셔 온 관세음보살님을 한 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님은 가족과 손님,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에는 관세음보살님에게 행복을 빌었지만
독립군이 된 요즘의 나는 기도의 내용과 방식을 바꾸었다.
무엇을 맹세코 하겠으니 지켜봐 주시라는 발원으로 바뀐 것이다.
절대적인 자유와 행복이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뜰에 역력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산방을 찾아오는 손님들과 나눌 수 있는 행복이
내 안에 마르지 않는 샘처럼 충만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니 내 기도는 행복이 가득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내 눈길을 안으로 돌리는 회광반조(廻光返照)나 다름없다.
눈이나 귀나 혀나 생각으로 참 행복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감각과 물질이 주는 행복은 인연 따라 오가는 찰나일 뿐이다.
옛사람은 말했다. ‘사람들이 만일 관자재보살을 보고자 한다면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귀로 들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귀와 눈을 쓰지 않는다면 비로소 관자재보살을 알게 된다.’라고 했다.
이는 <금강경>의 ‘만약 형상(色)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라고 한 말씀과 같은 뜻이리라.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은 동의어이다.
그런데 나는 <반야심경>을 대학시절에 처음 읽을 때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서로 사촌이거나 이복동생인가 보다 하고 헷갈렸다.
나중에 공부하면서 보니 인도어 아발로키테슈바라
보디사트바(Avalokitesvara bodhisattva)를 당나라 현장법사는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로,
인도스님 구마라집은 <법화경>에서 관세음보살로
변역한 이후 혼용되어 왔음을 알았다.
그래서 당나라 지혜륜(智慧輪) 법사는 두 가지 의미를 역출하여
자신이 번역한 <반야심경>에서 ‘관세음자재보살’이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관습적으로 ‘지혜’를 강조할 때는 ‘관자재보살’이 되고,
‘대자대비’를 드러낼 때는 ‘관세음보살’이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지혜’나 ‘대자대비’는 하나로 회통하는 것이니
지나친 분별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을 한 이후
그리스 문화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상 중에는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호남형의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힘 있는 아버지 모습이다.
그러나 중국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한결같이
무슨 일이든 다 들어줄 것 같은 자애로운 어머니 모습이다.
중국 당나라 때 부처를 찾으려고 집을 나섰던 양보(楊補)는
주막집 주인에게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맞아주는 사람이
바로 그대의 부처요 관세음보살이라는 충고에 집으로 돌아온 뒤,
‘부처는 집에 있다(佛在家中)’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지만
나 역시 어머니를 감히 나의 관세음보살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다 마찬가지라고 본다.
서구인들에게도 어머니란 존재는 불변하다. 유대인들의 탈무드 속담에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은가.
누가 나에게 관자재보살은 어디 계시고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주선사가 던진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란
화두를 통찰하라고 권하고 싶다.
‘부모 몸을 빌려 태어나기 전의 나는 누구인가?’ 하고
자기 내면을 징검다리 삼아 무심코 걷다 보면
지혜와 행복의 화신인 관자재보살과 맞닥뜨리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나라고 고집하는 나가 아닌, 자성(自性)이 없는 공(空) 속에 충만한
본래의 ‘또 다른 나’가 관자재보살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옥잠화는 지고 없지만 천지간에 옥잠화 향기는 여전하다.
인생 자체가 낙(樂)이 아니고 고(苦,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이만하면 살아 볼만한 향기로운 세상이 아닐까.
거친 비바람에 꽃이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다.
광대무변한 우주의 전언 같은 세상의 향기란 느끼는 자의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