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악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눈물은 용서할 수 없다.
2.목숨을 버릴 때가 되면 바로 버려라.
3.내일 죽더라도 글은 익혀라.
선생님, 옥아가 처음 칠판에 쓴 글씨였다.
물론 그것은 옥아만 아는 글씨였다. 25명의 아이들, 많은 숫자였다. 글자를 익히기 위해 간도 송지 인근의 아이들이 몰렸다. 그녀가 집집마다 찾아다닌 덕이었다. 물론 아이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보다 몇 살 위인 어른도 있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흩어져 있는 조선인촌에서 협조를 한 덕이었다. 옥아는 한껏 들떠 있었다.
“김만수?”
“네.”
“이철?”
“네.”
옥아는 순서대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미 학생들 이름은 모두 외운 터였다. 그들의 가족까지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30여 리 길을 걸어온 아이들도 있었다.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옥아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출석을 마치자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저게 무슨 뜻이에요?”
옥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바람의 흔적을 누가 볼 수 있는가. 구름의 흔적을 누가 알 수 있는가. 육신이 바람이나 구름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만물은 생기지도 않았고, 생긴 것은 만물도 아니었다. 뭔가 불결한 괴로움, 변덕의 상처로 하여 생성된 시샘이라는 그물.
이구는 그것을 버리고 기꺼이 바람이 되기로 했다. 구름이 되기로 했다. 그렇다면 회산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는 회산을 핑계 삼아 옥아를 찾고 있었다. 회산이 그려준 대로 이구가 힘겹게 발길을 돌린 곳은 회산의 고향, 간도 송지였다. 회산과 헤어진 지 꼭 두어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그것은 이구가 총에 맞은 상처를 치료하는 시간이었다.
회산의 지도대로라면 이구는 지금 두만강 서쪽 간도의 한 지점, 송지를 지나고 있었다. 조선 땅에서 200여 리도 되지 않는 곳이었다. 이 산을 넘으면 약 50여 리, 그곳에 도원리가 있을 것이다. 분명 옥아 또한 이 길을 갔을 것이다. 푸르고 푸르른 길, 그는 자신이 마치 능선을 따라 오가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할 수 없는 먼 옛날에 꼭 이곳에 온 같은 느낌.
그 느낌은 원시 이래로 수 만년 동안 경험된 것들이 자신의 피 속에 용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팽팽하게 개방된 감성의 대역 안으로 들이차는 온갖 종류의 그리움, 회한의 가슴속 조그만 불빛을 통해 들어오는 숲의 녹경.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옥아가 읽었고, 그리고 자신이 눈동냥으로 읽었던 그 많은 시편들, 그러나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결코 행복한 일이 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먼저 눈물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강아지처럼 풀밭을 뒹굴고 싶었다.
경사가 조금 급해지는 숲 사이로 소나무 숲이 나타났다. 북산에서 보았던 나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홀로 창끝처럼 창공을 찌르고 서 있는 북산지대의 나무들과 달리 이곳의 나무들은 포근했다. 그의 눈가엔 괜스레 이슬이 맺혔다. 마구 굴러도 하나도 다칠 것 같지 않은 솜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이 산을 지나면서 옥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삽화 염정우
반도 북녘의 6월.
완만한 오솔길이 끝나고 암릉과 주위의 송림이 어우러져 완만한 경사지대가 나타났다. 아무리 부드러운 산이지만 역시 바위산은 험했다. 산은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만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위와 바위 틈 사이로 이리저리 나 있는 길 위엔 반질반질한 이끼가 묻혀 주위에 낭떠러지가 있을 땐 오금이 저렸다.
그러나 즐거움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할 빛나는 여정이었다. 그는 유리알처럼 맑은 하늘을 연신 쳐다보았다. 한껏 초록의 잎사귀를 달고 있는 나무들을 다시 보았다. 무엇을 구할 것인가. 누구에게 구할 것인가. 무엇을 끊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옥아가 염불을 포기하고, 참선을 포기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언뜻 한껏 물 오른 나무 가지를 보면서 그는 자신이 마지막에 돌아갈 집을 생각했다.
그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살아 있다면 옥아는 저 성성한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산정에 올라서서 시퍼런 노송 사이로 군마처럼 몰려오고 있는 바람의 위압적인 돌진 행각을 바라보면서 돌아갈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환상 속에서나 맛볼 수 있는 어떤 절정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개마고원의 웅대함, 그러나 그 모든 풍경을 몽땅 준다고 하더라도 엿보기 산이 주는 아늑한 정취와 바꿀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타의로 구하고자 하던 불도를 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 땅은 분명 조선의 땅이 아니지만 조선의 땅이었다.
하늘이 만들어 준 놀라운 선물,‘뒹구는 돌멩이 하나에도 불성이 있다.’그는 옥아가 어느 날 휘갈긴 시구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옥아가 쓰는 글자들을 비웃었던 시절, 그러나 옥아는 한 번도 그에게 그 뜻을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비록 짙은 구름에 덮여 있으나 건너편 보랏빛 회색의 산록은 신선한 풀빛으로 덮여 있었다. 건너편 바위 산록으로부터 떠오는 안개의 해일은, 처음엔 하나의 작은 종이로 가득한 투명하고 거대한 통처럼 보였다. 한곳에서 정체하며 빙글빙글 도는 듯이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통으로부터 슬슬 빠져나온 눈송이들처럼 돌격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무리는 송림 위로 흘러가고, 한 무리는 아래쪽의 능선을 타고 넘었다. 그는 안개의 유연한 흐름의 본질이 바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자연을 다스리는 한 사람의 주재자, 그의 끝없이 부드러운 손길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그의 두 다리는 몽달귀의 발걸음만큼이나 빨랐다.
어느새 해 질 녘.
어디서 흘러오는 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좁다란 냇가가 물줄기를 불리는 아늑한 산 밑, 양지바른 언덕배기 마을 한 켠, 도원리라는 푯말을 따라 그는 마을로 들어섰다. 두꺼운 나무판자에다 정성스럽게 한글로 박은 글씨였다. 가슴이 뛰었다. 그들이 둘 다 이곳에 있을까? 이렇게 작은 마을에 한글 이정표를 해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비적이나 일본군이 판을 치는 이 흉흉한 간도 땅에.... 그는 그 푯말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다 합쳐야 열 채를 넘지 않을 마을에서는 뽀얗게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틀림없이 늦은 아침밥을 짓는 연기일 터였다. 그는 아주 설레는 마음으로 산 밑 첫 집을 찾아들었다. 한 눈에도 여느 집과 달라 보였던 것이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리나무 오리나무 어디서 자누
참나무 참나무 어디서 자누
둥굴레 둥굴레
달님 아래서 자지.
밝을레 밝을레
햇님 아래서 자지.
이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냥 마당에 서 있었다. 한 아이가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갔다. 이미 오래전에 예정된 듯이 옥아가 걸어 나왔다.
“아니!”
옥아는 싱긋 웃고 있었다. 이구가 이곳으로 올 줄을 알고 있었던 듯이. 그것은 이구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회산이었다. 틀림없이 옥아가 이곳에 있을 줄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찬바람 하나가 이구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직도 앳된 눈가에 그렁그렁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그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다만 입이며 얼굴 전체에 살짝 내려앉은 잔주름들이 그녀가 보낸 간난의 세월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옥아는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바위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이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백 년 천년 같았던 그 짧은 세월.
햇살은 밝게, 혹은 맑게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빛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이구는 옥아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너희들은 놀다가 오너라, 나중에 밀개떡 해주마!”
“야하!”
아이들이 다시 노래를 부르며 몰려갔다.
“오셨습니까?”
옥아의 말속엔 날이 서 있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이구는 알고 있었다.
“죽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아씨 스님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구는 일부러 짧고 건조하게 말했다.
“그러시겠지요.”
“다른 얘기는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들이 보낸 세월은 그저...... 고마운 일이오. 이런 상황 아래서도 아이들이 저렇게 똘똘하게 살아 움직이는 눈빛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우선은 너무도 대견 스런 일이오.”
어쩐지 이구의 말은 회산을 닮아 있었다.
옥아가 싱긋 웃음을 날렸다. 이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 거의가 몰살을 당했지요. 불온분자를 숨겨줬다고. 아이들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0여 리 멀리서 아이들을 구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소. 오리나무 참나무처럼 잘 자랄 겁니다.”
옥아가 고개를 들어 이구를 쳐다보았다.
“처사님, 저에게 처음 글을 배울 때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예?”
“이런 걸 배워서 뭘 하느냐고 절 울렸습니다.”
“그랬던가요?”
이구는 빙긋 웃었다.
옥아가 고개를 숙였다.
“내 눈 길을 피하지 마시오. 정작 아씨 스님의 눈길을 피할 사람은 나요.”
옥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구가 똑바로 말했다.
“그동안 혼자 계셨습니까?”
“예?”
회산의 소식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있었던 회산의 안부를 옥아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구는 옥아와 회산은 극락과 지옥 사이로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소식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구는 쓸쓸하게 웃었다. 이제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다. 부질없음. 그녀의 눈빛이 멀리 산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옥아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삽화 염정우
“......”
옥아는 여전히 웃음을 달고 있었다.
이구는 기어이 입을 뗐다. 그 많은 날들을 참았던 말이었다.
“왜 북산으로 가라고 하셨습니까?”
“......?”
그녀가 물끄러미 이구를 쳐다봤다.
“그 산에서 회산 스님과 함께 있었던 시절이 있습니다.”
옥아의 대답은 역시 간단했다. 이구는 어이가 없었다. 기가 막혔다.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옥아의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옥아가 북산으로 가라고 한 말에 무지막지한 의미를 둔 자신을 자책했다.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 겪었던 무참한 행군. 그러나 다음 순간 이구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찾기 힘들었겠지요. 그 산을 지금도 북산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산을 찾기 위해서 많이 걸으셨지요?”
옥아가 물끄러미 이구를 쳐다보았다.
순간 이구는 옥아의 눈을 외면했다. 그렇지. 그 산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은 십중팔구 이승의 사람이 아닐 터였다. 부끄러웠다. 그같이 가장 간단한 이치를 두고 자신은 그 많은 시간을 끙끙거린 것이다. 옥아의 얼굴은 웅이강의 물처럼 맑았다. 이구도 먼 산을 보고 있었다.
그때 방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밀고 나오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그가 먼저 곱게 합장을 하자 노인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노인의 얼굴은 무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마치 그가 돌이나 나무이듯 그렇게 건너다보고 있었다.
옥아가 이구를 노인에게 소개했다.
“회산 스님하고 같이 있던......?”
이미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걸터앉으시지?”
그러나 노인의 말은 무표정과는 다르게 낮으면서도 정감이 묻어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으면서 이구는 주위를 살폈다. 첫눈에도 이 집엔 그들 두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은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정말로 드물게 볼 수 있는 집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