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막 같은 초가 안.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명장사에서처럼 불빛이 흔들렸다. 그런데 옥아의 눈빛이 밝았다.
“스님?”
옥아가 회산을 불렀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지?”
이구는 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마 모르실걸요.”
옥아는 웃고 있었다. 금방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저 뛰어난 생명력. 회산은 비로소 얼굴에 미소를 달았다. 그것은 이구도 마찬가지였다.
“스님, 저는 예전에도 누구보다 행복했고, 지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잡니다. 저에게 오늘 이 시간은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시간입니다.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회산도 행복했다. 회산은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이구도 행복했다. 이구도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옥아는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저같이 행복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일본으로, 간도로 늘 저와 함께 있었던 두 분, 그런 여자는 이 땅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갚아야겠지요.”
“여기서 죽고 싶으냐?”
옥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할 일과 스님과 정처사님이 할 일이 따로 있겠지요.”
“허허, 우리더러 여기서 죽으라는 말이냐?”
“예.”
역시, 옥아는 옥아였다. 늘 옥아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회산과 이구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마음껏 웃었다. 서로 만나 웃는 것이 행복한 것인 줄을 옥아는 비로소 알았다. 정말 행복했던 날에 그것을 가르쳐주시지. 옥아는 슬쩍 회산을 흘겼다.
“여기서 우리하고 같이 죽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옥아가 아주 어른이 되었어.”
회산이 기쁘게 말했다.
“일본을 위해 죽는 일본 군인들을 보면서 부러웠습니다. 저는 그들이 일본을 원망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두 분은 못난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불쌍한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여기서 죽으세요. 그리고 스님, 무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조선 남자들을 너무 가여워하지 마세요.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 땅, 제 여자,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한 못난이들입니다. 그들은 많이 죽어야 합니다. 죽을 때 죽지 못한 남자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스님, 총을 드세요. 그리고 제발 다른 사람들 때문에 울지 마세요.”
그러면서 정작 옥아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회산과 이구가 눈을 감았다.
삽화 염정우
그 밤.
“내게 총을 주게.”
회산이 용구를 찾아가 한 말이었다.
용구의 눈과 회산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총을 드는 것은 이 나라를 위해서가 아닐세. 내가 총을 드는 것은 이 나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또한 내가 총을 들면 난 우리 스승님의 뜻을 어긴 게 되지. 그런데도 내가 총을 드는 것은 자네 때문이야. 이 온 나라에 자네만 한 사람이 어디서 또 나오겠나. 내 자네 때문에 세상을 알게 되었고, 자네 때문에 굶어죽는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나. 정말 저승으로 가는 길에 주막이 있다면 자네를 혼자 보낼 수는 없지.”
“형님!”
고요가 찾아왔다. 오직 회산과 용구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 용구의 기쁜 숨소리가 등잔불을 흔들었다.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다.
“지금, 왜 이렇게 마을 뒷산의 진달래가 보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그곳에 올라 보름달을 태울 수는 없겠지요? 내 아들을 데리고......”
“조금 있으면 진달래가 온 산과 들을 덮을 걸세.”
회산이 용구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자네가 죽으면 반드시 나도 죽는다.”
용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의 용구는 장군도 아니었고, 전장의 불굴용자도 아니었다. 그냥 회산의 아우였다. 용구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회산은 애처로운 눈으로 용구를 바라보았다. 다시 등잔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비바람이 올 징조였다. 이구는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용구를 찾아 불원천리 달려온 회산의 마음을. 그리고 그들의 어린 간도의 옛날을.
“내 바랑을 자네가 맡아주게.”
이구는 회산의 커다란 바랑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막연히 짐작만 하였지 그 내용물은 알지 못했다. 틀림없이 몇 권의 책이 있을 것이고, 나무 사발이 있을 것이고, 지난번처럼 얼마의 돈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이구는 회산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마지막 싸움이 있었다.
회산은 죽창을 들었다. 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구는 회산의 바랑만을 들었다.
“이제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난 것 같다.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 만에 하나 자네가 살아남는다면, 송지로 가게. 거기 도원리가 내 고향이야. 흐흐. 어제 내가 그곳으로 가는 지도를 그렸네.”
“저도 스님과 함께 죽을 겁니다.”
이구는 회산을 향해 예의 그 엷은 미소를 날렸다.
“옥아는 지금 여기를 떠나라.”
회산의 말은 명령이었다.
“두 분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요?”
옥아가 웃었다.
“그래, 웃어라.”
“저는 항상 정처사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옥아가 이구를 향해 눈인사를 했다. 부상당한 포군들 몇과 함께 옥아는 어둠을 틈 타 섬을 떠나고 있었다. 회산과 이구는 아득히 멀어져 가는 옥아의 검은 뒷모습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땅에 왜 허구한 날, 이별만 있는 것인가. 이구는 멀어져 가는 옥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이제는 끝난 것이다. 봄여름 가을 겨울,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인연붙이들과도, 못난 주인으로 하여 피범벅 눈물범벅이 된 이 산하와도. 회산은 말없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조선의 북녘 골짝 골짝을 흘러내린 빗물을 받아들인 두만강은 예전과 같이 흐르고 있었다. 햇볕 맑은 날이었다. 약속대로 회산은 선봉에 섰다. 이구는 회산 옆에 있었다. 강둑 저편에 중무장한 일본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용구가 단상에 올라 외쳤다
“장부가 사지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오직 떳떳한 일이오.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이니 뜻을 같이 하지 않는 동지들은 부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그러나 용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함성이 있었다. 와하! 그 소리들은 천둥과 같았다. 회산이 맨 먼저 돌진했다. 콩 볶는 소리가 들렸다. 이구도 회산을 따라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콩 볶는 소리가 잠시 멈추는듯하더니 칼 빛이 번득였다. 반짝였다. 그리고 흐르는 강물이 되었다. 그 강물 속에서 총과 칼이 춤을 추고 있었다.
참꽃이 피던 자리였다. 참나리가 피던 자리였다. 하늘보다도 높고 땅보다도 지순한 사내와 색시가 첫 보금자리를 틀던 자리였다. 형을 위해, 아우를 위해, 아니면 가엾은 부모와 새끼를 위해 무릎을 꿇고 낟가리를 하던 곳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언제나 바자울 같던 이웃들을 위해 울던 자리였다.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별을 보던 자리였다. 그곳에서 밀려나는 물과 밀려오는 물이 함께 울고 있었다. 흰 물결 검은 물결이 뒤엉키고 있었다.
하얀 두건을 두른 생명들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뒤로 뒤로 밀렸다. 보리 잎새가 바람에 흔들리듯. 사람들의 대가리들이 풀잎처럼 날렸다. 눈이 튀었다. 피가 튀었다. 여전히 함성이 울렸다. 함성이 끊어진 곳에 신음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있었다. 사람의 파도가 있었다. 큰물이 작은 물을 밀어내고, 작은 물이 큰물에 죽었다.
살얼음이 언 강물엔 바람만이 있었다. 구름만이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회산의 손엔 달랑 피 묻은 죽창 하나가 들려 있었다. 회산의 얼굴은 온통 붉은 피였다. 회산은 목젖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시 돌진했다.
“야아!”
마침내 푸욱! 뜨거운 응어리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러나 이구는 쓰러지지 않았다. 회산도 보이지 않았다. 용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주먹밥을 먹던 낯익은 얼굴들도 보이지 않았다. 언뜻 언뜻 일본군의 칼날이 강물에 반짝였다. 이구는 앞에 있었다. 그것이 목적이었다. 강물 저편에 일본군의 대가리가 있었다.
그때였다.
“죽여라!”
이번에는 이구였다. 불 달은 더운물은 얼음이 녹은 물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흰 물결이었다. 검은 물결이었다. 흰 물결이 검은 물결과 부딪쳤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고 살기 위해서 부딪쳤다. 하늘에는 사실 해도 없었고, 달도 없었다. 그리고 구름도 없었다. 그리고 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웃는 사람도 있었다. 이구였다. 이구는 분명하게 웃었다. 이구는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눈꺼풀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회산이 준 바랑을 챙겨들고.
삽화 염정우
그 해 봄, 백두산 일대를 근거지로 독립활동을 전개하던 백포군 90여 명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거의 모두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로써 백포군은 사실상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용구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회령 객사에서 효수되었다. 그리고 회산도 사라졌다. 그러나 이구는 회산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회산은 분명히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이구는 죽음을 무릅쓰고 백포군의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역시 회산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회산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위안부들은 철저하게 버려졌다. 일본군이 패주하면서 소개 사실을 알리지 않아 연합군의 폭격으로 많은 위안부들이 사망하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하거나, 개별적으로 힘겹게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포기하고 타국에 잔류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직도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그들이 원하는 배상은 다음과 같은 7개 항이다. 1.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2.진상 규명. 3.국회결의 사죄. 4.법적 배상. 5.역사교과서 기록. 6.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7.책임자 처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