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산길에서
추석 연휴인 닷새를 집사람과 둘이서만 지내기는 너무나 무료할 듯싶어, 제천시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제천을 택한 이유는 자연경관이 뛰어나 청풍명월이라 불리는 탓도 있지만 신선이 사는 경치를 볼 수 있다는 “정방사”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추석 전날은 예약한 숙소에서 머물렀고, 추석날 어둠이 머물러 있으려는 새벽에 혼자 숙소를 나섰습니다. 시(市)라고 하지만 정방사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산길이고, 전조등을 켜도 어두워서 낮은 속도로 운전해야 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정방사 진입 지점에 도착하였고, 어둠 속에서 선뜩 나서는 연세 지긋한 노인분의 제지로 차를 멈췄습니다. 절 밑에 주차장이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지만 ‘차를 놓고 올라가야 한다’는 점잖은 요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것이 아닌 물건을 보고자 하면 물건의 주인이 아닐지라도 우선은 그 지시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로등이 없어서 칠흑같이 어두운, 주차장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곳에 간신히 주차시키고 노인께 여쭸습니다.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되는가요?”
“그렇습니다.”
오름길은 차량이 오르내리기에 충분히 널찍한 시멘트 포장도로였습니다. 차량 진입금지 이유를 묻지 않은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이었고, 우스개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객지 사람이고 ‘믹스견도 자기 동네에서는 50점의 프리미엄으로 큰소리를 친다’는 격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오르면서 깨달은 실수는 새벽길을 나서면서 플래시를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울퉁불퉁 자갈이 밟히는 자연 그대로의 산길은 아니어서 발을 잘못 디뎌도 접지를 염려가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를 걸어도 어두워서 주변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둠으로 눈이 자기 할 일을 잃자, 귀와 코가 부지런히 자기 일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람소리가 아닌 다른 어떤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알기 위해 귀가 당나귀처럼 곤두세워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또한 어슴푸레 보이는 큰 나무를 보고 ‘내가 지금 산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짙은 소나무 향을 코가 먼저 느꼈기에 이 길이 깊은 숲속이라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시간도 느리게 가는 듯합니다. 어느 정도를 걸어왔거니 생각하는 찰나에 호루라기 소리가 주변에서 퍼져 나왔습니다. 누군가가 ‘산짐승을 쫒아내려 호루라기를 부는구나’라 생각하면서 걸었고, 얼마 못 가서 또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자 ‘아, 이곳에 멧돼지가 많은가 보다’라는 두려움이 일어났습니다.
어둠은 두려움을 줍니다. 대낮이면 보이지 않아서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만 않을 뿐 ‘무엇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기에 코앞에서 당할 수 있는 일에 겁이 났습니다.
불자로서 이 어두움을 겁내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신의 어두움(無明)을 두려워하고 그 어두움에서 비롯되는 번뇌와 인생의 사고팔고(四苦八苦)를 두려워해야 할 터인데, 일차원의 자연현상에만 급급해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를수록 밝아지는 여명에 길가 숲은 빽빽함을 드러냈고, 군데군데 소나무들 몸매도 생각한 것처럼 육중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이것저것을 봄으로써 알아채고 깨닫는 것을 보면, 몸과 마음을 편안케 하고 우리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는 눈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문득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보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눈을 떠라. 누가 눈을 감겼다고 스스로 보지를 못하는가?’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몸과 마음에 때가 잔뜩 낀 채 어둠 속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참회하며 계속 걸어 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이 길을 산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표지를 세워놓았는데, 그것을 보고서야 올라가는 길의 이름이 “자드락길 2코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을 자드락이라 하니, 자드락길은 그런 땅에 난 좁은 길을 일컫는 말입니다. 제천시는 청풍명월 곳곳에 자드락길을 닦아놓았는가 싶습니다.
가파른 길에는 오르내리는 차량끼리 맞부딪힘을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비켜서는 곳을 마련했는데, 곳곳마다에 차량이 주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영락없이 「입산자 안내문」이 붙었는데, ‘입산하는 구역이 마을에서 운영하는 송이버섯 채취장으로 무단 채취를 하지 금지한다’는 내용입니다. 알고 보니 주차하고 있는 차량은 동네 주민들의 차량이고, 차량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외부인의 버섯 채취를 단속하기 위한 동네 주민들의 방편이었습니다. 또한 호루라기 소리는 입산자에게 경고를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좀 전에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멧돼지에 대한 두려움을 품었던 것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소치였으니, 부처님께서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번뇌와 고통이 발생하니, 모든 번뇌를 없애려면 올바른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실제로 체험한 것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방사 바로 아래에 주차장이 있음에도 땀 흘리며 걸어 오르게 하는 것에 성냈던 것도 저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으니, 새삼스레 지혜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렁저렁하는 사이에 정방사 바로 아래에 도착한 시각은 6시 50분, 어두운 산길을 한 시간 동안 쉼 없이 걸어온 셈이었습니다. 때마침 계절이 초가을이고 걸은 시간도 하루 중 가장 온도가 낮을 때여서 땀이 등 고랑에만 촉촉한 정도에 머물렀지, 보름 정도만 앞서 왔더라면 온몸은 진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여는 문
정방사에는 마음먹은 곳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문이 없습니다. 이곳부터가 성역이라는 일주문을 세우지 않았고, 마귀 퇴치 임무를 수행하는 사천왕과 금강역사가 머무는 천왕문과 금강문 등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한 명이 지나칠 수 있는 정도 폭으로 큰 암석 두 개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마주 보고 선 큰 돌 두 개는 나의 방문을 반겼고, ‘이제 다 왔구나’하는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며, ‘어떤 즐거운 일이 벌어질 것인가’하는 들뜬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정방사에 들어가는 하나뿐인 문에는 많은 뜻이 담겨져있습니다.
“문”이란 것이 목적한 곳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들어가는 곳을 알려주는 의미라 생각하면, 어떠한 것으로 만들든 저 멀리 아래에서 힘들게 올라온 성의를 알아주면 족할 것입니다. 이곳의 경우는 부처님을 모신 곳임을 나타내고, 부처님을 뵙게 될 것임을 알려주면 충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상징성만 갖추면 족한 것이지 꼭 크거나 아름다운 “문”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마귀를 물리치는 일을 짚어보면 마귀가 활개치고 돌아다니는 놈이 아니고,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놈이므로 마귀 퇴치는 사천왕과 금강역사가 아니라 불자들이 항상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건방진 이야기지만 우리 불자들은 돌문을 지나며 스스로 속세의 때를 씻어내고 참회하며, 스스로 마귀를 퇴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마주 서있는 돌을 피해서 진입하는 길을 낼 수 있었음에도, 조신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출입구로 삼은 옛사람의 뜻이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