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적절한 장소에서 살아가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으며, 귀촌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천성적으로 산천을 좋아하는 기질 탓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충청남도의 한 산골마을 산 기스락에 집 짓고 텃밭 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설사 귀촌이 꿈이었다고 해도 서울 토박이 아내의 동의가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니, 그저 모든 인연사가 고마울 뿐입니다.
“내 집은 언덕 비탈, 어린 소나무와 호두나무로 이루어진 숲 한복판에 있는 더 큰 숲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호수에서는 30미터쯤 떨어져 있고, 좁은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면 호수에 닿은 수 있었다. 앞마당에는 검은딸기, 풀솜나물, 물레나물, 미역취, 떡갈나무, 벚나무, 월귤나무, 땅콩이 자라고 있었다. 5월 말이 가까워지면 벚나무가 짧은 줄기 주위에 산 모양의 꽃들을 원통형으로 피우고 호수로 이어진 오솔길 양쪽을 장식했다. 가을이 되면 그 짧은 줄기는 크게 야무진 버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치 사방으로 퍼지는 빛살 같은 화환 모양으로 휘어졌다.”
소로는 저명한 그의 저서 <월든>에서 자신의 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적절한 장소는 세상과 조금은 동떨어진 곳에서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으며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은 게으름을 나무라지 않는다.’며 마음껏 느슨해지기도 하고, 영국 시인 윌리엄 쿠퍼(1731~1800)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 “나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군주이며/ 그런 내 권리를 문제 삼을 자는 아무도 없다.”를 읊조리며 고독한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소로가 머물기 원했던 집은 이렇듯 모든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시야에 들어오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의 주재자가 될 수 있는 ‘외진 곳’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집이란 라틴어로 세데스(sedes)가 의미하는 것처럼 온갖 자유와 게으름과 고독과 공상과 사색과 변화를 만끽할 수 있는 ‘앉는 자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소로는 숲속에 살면서 ‘날마다 아침은 나에게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순결하게 살라고 권했다.’고 술회하면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다시 날마다 새로워지라.’는 중국 탕왕의 욕조에 새겨져 있다는 글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마음껏 게을러질 수 있다는 장점을 언급했으나 실상 그의 삶은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는 치열함 그 자체였던 것이지요.
가끔 펼쳐보곤 하는 <월든>을 읽다가, 대승불교가 꽃피우던 시절(7~8세기) 경의 고명한 인도 고승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서 읽은, 차라리 시의 한 구절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서원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언제 숲속으로 들어가
새들과 나무와 함께 살 수 있을까?
함께 있기만 해도 기쁜 그들과
언제나 함께 머물 수 있게 하소서. [8:25]
아무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시원스레 열려있는 넓은 곳에서
아무 집착 없이 자유롭게
언제나 거기에 머물게 하소서. [8:27]
꽃향기 가득한 시원한 달빛 아래
궁전처럼 넓은 바위에서
솔솔 부는 산들바람 맞으며
중생들을 이롭게 할 생각에 잠겨 소요하리라. [8:86]
소로보다 천년 이상 이른 시기를 살았던 산티데바의 한 차원 다른 글을 읽으며, ‘적정처(寂靜處)’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자 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원력, 아무도 ‘내 것’을 내세우지 않는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하늘을 지붕 삼고 넓은 바위를 좌복 삼아 요익중생을 위한 방편을 찾겠다는 보살의 삶! 참 적정처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산티데바는 시를 넘어선 시로써 노래한 것입니다.
적정처란, 사실 수행하며 살기에 적절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적정처가 반드시 외진 곳에 자리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곳이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에 의해 적정처일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티베트의 옛 고승 ‘아로 예세 중내’의 족첸수행 지침을 담은 책 <깨달음을 얻는 티베트 수행 요결>에는 적정처에 대한 매우 요긴한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외적 적정보다는 몸과 입과 마음의 적정이 더 근본적인 과제라는 뜻이지요. 이 가르침에 따르면, 악행을 피하고 나와 이웃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몸의 적정입니다. 쓸데없는 수다, 험악한 말, 부적인 말,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말을 삼가는 것이 입, 즉 말의 적정입니다. 험담에는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하찮은 것에 대해 말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간과의 대화를 줄이면 고요가 찾아옵니다. 긴 시간이 아니더라도 묵언수행을 해본 분이라면 말 줄임의 효과를 실감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적정이 있습니다. 마음의 적정이란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입니다. 이런 감정들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 거기에 종속되어 휘둘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예컨대, 집착이 일어나면 ‘집착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놀랍게도 그런 오염된 마음들이 사라집니다.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행복해지는 길로서의 ‘적절한 장소’가 반드시 적정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절한 장소는 ‘몸과 마음의 지혜를 깨닫기에 알맞은 장소’입니다. 건전한 삶을 살아가기에 적합한 여건, 마음공부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춘 곳이면 그곳이 숲속이든, 산골이든, 도심이든, 한적한 곳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적절한 장소의 기준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출가자에게 적절한 장소는 개와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적한 곳인 동시에, 탁발공양을 할 수 있으며 수시로 설법을 할 수 있는, 즉 거리적으로 사부대중과 단절되지 않은 위치여야 합니다. 반면 세속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재가자의 적소는 홍수 등 재난이 닥칠 위험이 적고, 먹을 물이 있으며 주위 환경 등이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아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명당자리를 선호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명당은 생명을 보호하고 지탱해 주는 터를 말합니다. 인도의 강가(갠지스) 강이 신성시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인도 곡물 생산량의 3/4이 강가 강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사람이 건강한 육근을 갖고 태어나거나,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전생부터 쌓아온 선근공덕입니다. 악업을 많이 지은 자는 인과의 원칙에 따라 악취가 나거나 난해한 환경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장소에서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쉬운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귀촌해 나무와 새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절감한 것은 사는 장소가 어디인가 보다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새 울음소리, 뒷산 자락에 자생하는 대숲의 바람소리도 싱그럽기 짝이 없지만, 이런 환경들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조수해(鳥獸害)로 골치를 앓습니다. 새와 짐승들에 의해 발생하는 농작물 피해(손해)가 생각보다 큽니다. 현실적으로 농부에게 새와 짐승은 경계의 대상입니다. 이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밭에 그물이나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콩 세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화책 같은 곳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거나 들어보았을 주제입니다. 예컨대 이런 내용이지요.
할아버지와 손녀가 텃밭에 콩을 심었어요. 손녀는 땅에 구멍을 파고 콩 한 알을 묻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콩 세알을 묻었어요. 손녀가 갸우뚱거리며 할아버지에게 물었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왜 아깝게 한 구멍에 세 알씩이나 넣으세요?"
할아버지는 땅에 구멍을 파고 콩 세알을 심으며 말씀하셨어요.
"아가야, 한 알은 땅에서 사는 벌레가 먹고 한 알은 하늘에 사는 새가 먹고 마지막 한 알은 싹이 나서 우리가 먹는 것이란다."
콩 세알이라는 말속에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아름다운 정경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다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모르되, 농사를 짓는다면 이런 이야기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나뭇가지 잘라낸 후 아파하거나 벌레 몇 마리 죽이고 죄책감에 떠는 그런 삶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밭을 갈되, 마음의 밭(心田)을 갈라고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행을 함에 있어 외적 환경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흔들려서는 도과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수행이 깊지 않고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일수록 외적 산란 요인이 없는 곳에 몸을 두고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를 관찰해야 합니다.
특히 재가자들의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출가자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 부양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교육도 받아야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빈번하게 교류해야 합니다. 수행적 측면에서 본다면 재가자의 환경은 출가자에 비해 열악합니다. 그렇더라도 건전한 삶의 지침과 베푸는 삶, 나아가 수행하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렵더라도 주어진 여건을 개선하려 노력해야 하고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가능한 팔정도를 실천하려 애써야 합니다. 이런 삶을 위해 보다 나은 장소를 선택하거나, 지금의 삶터를 가꾸어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도시든 시골이든, 산골이든 저잣거리든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적절한 장소로 만들고자 하는 주체적 노력이 중요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삶을 살 때, 각자 위치한 자리가 적절한 장소일 것입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