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아는 목욕을 마치고 관리인이 건네주는 일본 옷을 말없이 주워 입었다. 이제 완전하게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다. 위안소의 관리인은 50대의 조선인 부부였다. 이곳 위안부들이 거의 모두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관리인의 말대로라면 이제 더러운 조선의 때를 모두 벗고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뿌네.”
“이뻐!”
조선 관리인 부부가 감탄을 연발했다. 거울 앞에 선 옥아는 일본 여자가 된 자신을 바라보았다. 기모노를 입은 꼴. 아직도 바보 같은 갓을 쓰고 팔자걸음으로 걷는 조선 양반들.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기모노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옷은 옷인 것이다. 그런데 눈물이 쏟아졌다.
“무서워할 것 없어. 별것 아니니까.”
여주인의 말을 들으면서 옥아는 웃었다.
“오늘 니시하라 중좌님......”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하게 했지.”
옥아는 관리인 부부의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니시하라 중좌만 복받은 게 아니고, 아스카, 너도 복받았어.”
여기서 옥아 이름은 아스카였다. 11번, 밝은 태양의 향기. 관리인 여자는 옥아의 옷매무새를 여며주면서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옥아는 잠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을까? 그들 부부의 잔주름을 보면서 옥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코 밉지 않았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식도 팔아먹는 세상, 어리석은 조선인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제 이익에 빠르고 영악한 사람들의 집단인 조선이 왜 천황을 받드는 한 가지 생각으로 똘똘 뭉친 멍청한 일본인들에게 송두리째 나라를 빼앗겼을까?
“여기가 어디인가요?”
옥아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그러나 부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옥아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끝없이 펼쳐진 벌판, 산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섬이었다. 들리는 것은 총성뿐이었다. 간간이 총소리가 가까워지면 병사들을 태운 트럭이 분주했다. 지친 듯 보이는 병사들을 어디론가 나르고 있었다. 민감한 옥아는 짐작하고 있었다. 일본군 병사들의 움직임엔 일사불란한 정렬과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엔 독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깎던 병사, 의무실의 병사, 모두의 눈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졸고 있었다. 불안한 얼굴들. 그들의 적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놈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여자들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옥아는 더 묻지 않았다. 조선 관리인 부부의 얼굴에도 그것이 묻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삽화 염정우
그날 밤, 조용히 11호 방문을 연 것은 예상한 대로 마이크를 잡고 연단에서 큰소리를 치던 니시하라였다. 옥아는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처음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나?”
모자를 벗으면서 니시하라가 옥아를 쳐다보았다. 옥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 끝에 앉아서 맞은편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시하라도 옥아 옆에 걸터앉았다.
“아주 용감하더구먼.”
옥아는 니시하라의 씨부렁거림을 듣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여태껏 자네 같은 여자는 한 번도 없었어. 일본인 여자도. 정말 자네가 조선 여잔가?”
니시하라가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렇지만 옥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니시하라의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잘은 모르지만 화장품 냄새가 분명했다. 11번 방에 들어오기 위해 꽤 신경을 쓴 것이다. 옥아는 웃었다.
“오늘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
니시하라는 아주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옥아는 더 이상 듣기 싫었다.
“나하고 얘기하러 왔나요?”
옥아는 고개를 돌려 니시하라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니시하라가 얼굴을 붉혔다.
“난 일본인하고는 오래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옥아의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경멸의 눈빛이었다.
“뭐야?”
“아마도 조선 여자들처럼 일본 여자들도 이렇게 당하는 날이 올 거요.”
니시하라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죽기를 자청하는군.”
“이곳에 올 때 이미 나는 죽었소. 내 시체를 안고 뒹굴어보시지.”
니시하라가 담배를 빼물었다.
“미국군이나, 중국군의 병사들도 당신들처럼 여자를 좋아한다니까.”
“나는 사지를 찢어 죽인다.”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내뿜으며 니시하라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렇게 해보시지. 한두 번 한 것도 아닐 텐데. 그렇지만 알아두시오. 오래가지는 못할 거요.”
유창한 일본말이었다.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며 니시하라가 옥아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여기 왔나?”
“조선 사내들이 못나서.”
옥아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니시하라의 미간이 흔들렸다.
“처음인가?”
“왜?”
옥아와 니시하라의 눈빛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내가 묻고 싶은 말.”
옥아는 순식간에 니시하라를 쳐다보던 눈빛을 거뒀다. 이제 할 말은 끝난 것이다. 동시에 니시하라가 벗었던 모자를 다시 썼다. 그는 싱긋 웃었다.
“내가 받은 명령서에는 후쿠오카에 주둔하고 있는 서부군 제74 연대에 50명 정도의 조선 여성을 20일 이내에 끌어오라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관부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을 왕래하여 조선 여성을 끌어모았고, 시간이 촉박할 때는 조선 내의 도 경찰국에 전화로 미리 통지했다. 그리고 2~3일 후 부하 10여 명을 데리고 현지에 도착하면 이미 예정표가 작성되어 있었다. 현지 경찰이 마을의 인구수를 감안하여 몇 사람씩 할당을 해 놓고 있었지. 나는 그곳 경찰 30~50명을 대동하고 경찰용 호송 트럭으로 예정된 마을을 급습했다. 우선 경찰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마을 전체를 포위하여 도망가는 사람을 막고 나머지는 마을 사람을 한곳으로 모이게 했다. 마을 사람이 전부 모여도 정신대로 끌어갈 만한 여자는 3~4명에 불과했다. 도망가는 사람들은 경찰이 사정없이 목검으로 내리치고, 울부짖는 여자들을 후려갈기며 젖먹이 아이를 팔에서 잡아떼며 억지로 트럭에 실었다. 아기를 업고 나온 여자들은 반 광란 상태였지. 아기를 여자로부터 떼어내 노인에게 던져 주고 머리채를 질질 끌어 무조건 호송차에 실었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울면서 호송차를 뒤쫓아왔다. 그 아이를 팽개쳐 밀어내고 애원하는 노인은 발길질로 넘어뜨렸다. 온 마을이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마을에서 반항할 만한 젊은이들은 이미 군대나 보국대로 끌려가고 없었기 때문에 크게 반항하지 못했다. 하기야 조선 사내들은 조금도 겁나지 않아. 게 중에 조금 용감하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 조선을 떴으니까. 나는 주로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를 뒤지면서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 사냥'을 했다. 이렇게 끌어모은 여자들은 수백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화물열차에 실려 부산으로 이송되어 관부 연락선에 태워졌다. 시모노세키를 거쳐 서부 군 사령부에 인계하는 것까지가 내 임무였다. 대부분 끌려온 조선 여자들은 남방의 위안소로 보내졌지. 일본에서 끌려온 너는 아주 특별한 경우지. 나와 같은 임무를 가진 수 천명의 사람들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군부의 명령을 착착 실행했다. 아마도 끌려온 조선 여자가 10만에서 20만 명 정도는 될 거야. 아니면 그보다 더 될지도 모르지. 닥치는 대로 사냥했으니까. 흐흐. 우리는 조선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일본을 위하는 일이라고 믿으니까!”
니시하라는 미친 듯 읊고 나서는 한껏 웃고 있었다.
“......”
“내게서 이런 말을 듣고 싶었나?”
“그대의 나라를 왜 왜국이라고 하는 줄 아나?”
니시하라가 천천히 칼을 꺼내들었다.
“쪽빠리. 겉도 속도 모두 난쟁이들이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쪽빠리는 쪽빠리지. 난 조선이라는 나라가 싫어. 아마 당신보다 더 싫어할 거야. 조선에 태어난 것 자체가 싫어. 그렇지만 조선 사내들은 적어도 당신들 같은 짓은 하지 않아. 난쟁이들의 특징이 뭔 줄 아나?”
옥아는 태연했다.
칼을 잡은 니시하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게 되지. 다른 사람의 어깨너머는 볼 수가 없어. 키가 작으니까. 당신도 나보다 키가 작은 것 같은데?”
니시하라가 옥아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옥아는 눈을 뜨고 니시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은 옥아의 목 앞에서 순식간에 멈췄다.
“흐흐흐!”
옥아가 웃었다.
“죽기를 작정했구나.”
“맹물을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일 텐데. 성스런 전쟁을 치른다는 전장에 강제로 여자들을 데려다가 욕을 보이고, 그러고도 모자라 여자들 목을 치는 게 당신들이 입만 벌리면 내갈기는 대일본제국의 사해동포 정신인가, 당신들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하늘 같은 천황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나? 당신, 정말 군인이오? 흐흐흐!”
니시하라가 칼을 칼집에 넣었다.
“소원대로 해주지.”
삽화 염정우
옥아는 그날 무려 10명의 군인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오늘은 1중대, 내일은 2중대가 오는 식이었다. 보통 주말에는 25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 옥아는 위안소에 있는 어떤 여자보다 많은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것은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일과가 되었다. 위안소에서 강간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고 매일 계속되는 일상이었다. 일본 병사들은 바지와 심한 경우 팬티까지 벗고서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낄낄거리면서. 바깥의 군인들은 늘 소리쳤다.
“빨리!”
“빨리!”
그래서 일을 마치고 나가는 병사들도 방밖에서 바지의 단추를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지옥 속에서도 일상의 리듬이 형성되어 갔다. 주말과 주 중, 낮과 밤 시간, 특히 전투 이전과 전투 이후에 따라 위안부들의 패턴은 달라졌다. 일상적인 일과에도 군대 내의 위계질서가 고스란히 유지되었다. 장교와 사병의 위안소 이용 시간은 분리되어 할당되었다.
옥아는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몸을 놓았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나무토막이었다. 다행히 그런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군인은 없었다. 다만 밥이 너무 적어서 배가 고팠다. 옥아는 그런 자신을 돌아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밥도둑, 자신의 육신은 이제 그것뿐이었다.
한 위안부가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한 장교가 병에 걸려 죽었다. 다른 장교가 그 위안부의 자궁에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넣었다. 위안부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매달려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