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일제는‘노무조정령이라는 법을 선포하였다. 일본이 원하면 언제, 어느 때, 누구든 징발하기 위해서였다. 오직 일본을 위해 마소처럼 잔인한 노역을 감당할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국을 운운하며 나라 타령을 하던 양반들은 비켜갔다. 그러나 풀뿌리 죽 한 사발에 목숨을 구걸하던 사람들은 동서남북으로 뿌려졌다. 홋카이도 광산 한 곳에만 배치된 한인 노무자 수만도 약 14만 5천 명. 그들은 갱이나 공사장에서 가혹한 노동과 매몰 사고로 죽었다. 그러나 갱도가 매몰되어도 시신조차 수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방 전까지 일본으로 간 징용자는 236만여 명. 일제 강점기 36년간 일제 억압에 의해 이주해가거나 강제 동원됐던 한인의 숫자는 무려 약 500만 명. 해방 당시 한반도 총 인구는 약 2천500만 명이었다. 총 인구의 20%에 달하는 사람들이었다.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주인집 마당에 아버지가 엎어져 있었다. 주인집 아들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아버지를 둘러싼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냥 웅크리고만 있었다. 주인집 아들이 무어라고 지껄였다.
서편 하늘로 핏빛 노을이 섰다.
주인집 아들의 몽둥이가 그 노을 위로 올라갔다. 이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게를 진 채로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구는 한 그루 나무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 마리 말똥구리였다.
이구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왜 주인집 아들에게 매를 맞는지를. 여섯 가족, 그들 모두를 살리는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너무 크고 무거운 짐이었다. 더구나 요즈음 자신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다. 가족들 호구지책은 고스란히 아버지의 몫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주인집 곡간에 손을 댔을 것이다. 근동 제일 부자, 최성한의 마름인 아버지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형편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도 식구들의 호구를 채우기는 힘겨웠던 것이다.
주인집 아들의 몽둥이가 자꾸만 하늘로 올라갔다. 이구는 천천히 지게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인집 아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에 이구의 눈에서는 샘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인집 아들이 힐끗 웃었다. 그리고 다시 몽둥이를 하늘로 쳐들었다. 그의 어깨 위로 주인집 아들의 몽둥이가 내려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래도 이구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미 죽기를 각오한 몸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 대신 죽겠다는 생각이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몽둥이세례가 퍼부어졌다. 드디어 이구가 쓰러졌다. 이구의 등짝은 핏물이 들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엉금엉금 일어났다. 아버지는 주인집 아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면서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피투성이인 아버지의 얼굴에 주먹만 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자 주인집 아들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지나갔다. 주인집 아들이 다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가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구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구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매를 맞으면서 울고 있는 아버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구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지게 작대기를 옹골차게 쥐고 있었다. 이구는 사람들을 헤치고 주인집 아들에게 다가갔다.
아버지에게 몽둥이세례를 퍼붓던 주인집 아들은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을 들어 이구를 쳐다보았다. 이구도 주인집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구의 눈빛은 이미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이구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스쳐갔다. 주인집 아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스쳐갔다. 그러나 이구가 하늘로 지게 작대기를 들어 올렸을 때 주인집 아들의 안색엔 핏기가 사라졌다.
비로소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이구의 단단한 지게 작대기는 정통으로 주인집 아들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세찬 비명과 함께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구는 닥치는 대로 지게 작대기를 휘둘렀다. 누구든 다 때려죽일 태세였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이구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오직 주인집 아들의 정수리에만 지게 작대기를 내리쳤다. 주인집 아들의 머리가 금방 피범벅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이구는 멈추지 않았다.
삽화 염정우
언제 일어났는지 엎어져 있던 아버지가 이구의 손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버지는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이구가 아버지를 뿌리쳤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버지의 비굴한 얼굴, 미웠다.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견딜 수가 없었다. 이구는 자신도 모르게 지게 작대기를 휘둘렀다. 이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몸의 힘을 지게 작대기에 실었다. 무서운 속도였다. 단 한 번에 아버지가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지를 늘어뜨린 채. 이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돌렸다. 이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마침내 지게 작대기를 손에서 놓았을 때 어린 조카가 뛰어왔다. 그러나 누구도 이구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그의 삼베옷은 온통 피였다. 그는 조카의 울음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며 미친 듯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속에는 오직 한 사람, 옥아의 얼굴 밖에 없었다.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더구나 아버지까지 죽였다고 하면 그녀는 어떤 표정일까? 두려웠다. 그런데도 그는 명장사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아씨 스님이라고 부르는 그녀는 머리를 깎지도 않았고, 탁발을 다니지도 않았다. 그녀는 목탁을 두드리지도, 염불을 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아씨 스님이라고 불렀다. 회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도 회산에게 그녀는 상전 중의 상전이었던 것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회산의 도반들 또한 옥아를 회산이 다듬고 있는 보석 중의 보석이라고 말했다. 이구는 산으로 올라가면서 그녀와 만났던 때를 생각했다.
참꽃, 나리가 흐드러진 봄날이었다.
이구가 여우골에서 우람한 참나무를 찍고 있을 때였다. 그녀도 항상 산을 떠돌아다녔다. 긴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자세히 보면 당돌하기 짝이 없는 처녀였지만, 멀리서 보기엔 갓 시집온 색시와 같이 수줍은 얼굴이었다. 그는 겨우 먼 발치에서 몇 번 목례를 한 정도였다.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 그 누구도 그녀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갓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그녀에게. 서슬 퍼런 주재소에서도, 근동의 대지주인 최씨 가문에서도 그녀에게만은 깍듯한 예의를 갖췄던 것이다. 그녀는 산촌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단정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아낙네였던 것이다. 소문으로는 일본 말은 물론이고, 중국어나 러시아어까지 한다는 거였다. 더구나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성품이었다. 그래서인지 명장사에는 적지 않은 시주가 들어왔다. 그 덕분에 겨울 굶주림을 이기고 살아난 아래 마을 집이 많았다.
“처사님은 언제나 그런 나무만을 찍습니까?”
우스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나무꾼에게 할 말이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생계가 달린 문제였다. 그렇지만 이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팔자 좋은 여중이 뿌리는 객담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마에 땀 한번 흘리지 않은 사람들, 손에 흙 한번 잡아보지 않은 중들을 그는 경멸했다. 따뜻한 화롯가에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 그러나 선보리가 익는 봄이 오기도 전에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씨알이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이구는 가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다음 말은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 나무들 중에는 처사님보다 몇 백 년을 더 오래 산 것도 있습니다.”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이구가 인상을 찡그렸다. 정곡을 찔렸던 것이다. 도끼를 든 그의 손이 잠시 주춤거렸다. 참하게 아랫단을 찍힌 참나무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맨 꼭대기의 가지 사이에 이미 허물어진 새집이 있었다.
“하다못해 돌 하나 풀 하나에도 영혼이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
“이름을 뭐라고 하십니까?”
“이구입니다.”
“예?”
부끄러웠다. 그러나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형님이 일구입니다.”
“아!”
그녀의 작고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처음, 그녀의 말은 지나가는 바람만도 못했다.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중 하나가 자신도 모르는 세상 이치 하나를 가르쳐 준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세상을 생각하고, 더구나 나무나 새의 생명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어깨엔 많은 식구들의 생사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와의 첫 만남 이후 달포가 지날 무렵, 그날도 그는 별생각 없이 한 짐의 나무를 지고 명장사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달라졌다.
명장사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그녀를 다시 본 것이다. 산에서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물을 떠놓고 하늘에 치성을 올리고 있었다. 땅거미 흩날리는 명장사의 저녁, 동작 하나 하나에 정성이 묻어 있었다.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기 전에는 늘상 보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식은 어머니나 할머니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두 손을 모은 손끝에 힘이 있었고, 내려감은 두 눈엔 접근하지 못할 신성이 있었다.
그녀는 절도 있는 몸짓으로 하늘을 우러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숨이 가빴다. 나뭇짐 때문이 아니었다. 목이 말랐다. 비 오듯 흐르는 땀 때문이 아니었다. 목구멍을 타고 오는 감당할 수 없는 열기가 있었다. 마지막 태양의 몸부림 때문이 아니었다. 하얀 모시적삼 속의 그녀, 처음 본 얼굴이 아닌데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산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은 박속처럼 선연했다. 가슴이 뛰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밀려왔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후로 이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줄곧 나뭇짐을 지고 명장사 근처를 어른거렸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날은 산속에 숨어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우물가에 나와 있을 때를 택해 명장사로 들어섰다.
“무슨 일입니까?”
그녀가 이구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고운 목소리였다. 그렇게 큰 결심을 했는데도 오히려 얼굴을 돌린 건 그였다. 그녀는 마을의 처녀들과 달랐다. 너무 달랐다. 그랬기에 인근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이다. 우선 말을 하는 모양에 품위가 묻어 있었다. 이구는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이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주춤거렸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을에도 처녀들이 많았지만 한 번도 그들을 여자로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식솔들 건사하기 바빴던 것이다.
그런데 숨이 막혔다. 그것은 벼락이었다. 천둥이고, 번개였다. 까닭 없이 부끄러웠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몇 날 며칠을 두고 만들어놓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다.
“나무를.......”
“예?”
이구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구의 그런 모습을 보고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나뭇짐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지게 작대기를 든 그는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얼른 부엌으로 나뭇짐을 부렸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녀의 얼굴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이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부아가 치밀었다. 괜스레 하지 않을 일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난감한 일이었다.
“제가 가시나무만 하라고 했을 텐데요?”
“진짜 나무꾼은 가시나무는 하지 않습니다. 가시나무는 아무리 많이 해도 며칠 때지 못해요.”
그녀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곰 발바닥처럼 커다란 손,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도무지 그녀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이구는 묵묵히 그녀의 손을 쳐다봤다.
“가시나무가 이 손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찔린 자리에 또 찔리고...... 흐흐, 그렇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고운 얼굴에 거미의 손. 왜 하필이면 다른 나무 다 놔두고 가시나무만을 했습니까? 그렇지만 그 말은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가 방긋 웃음을 달고 있었다. 까닭 없이 가슴이 가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세상 나무 중에 태울 것은 죽은 나무하고 가시나무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가시나무는 태워도 되나요?”
“글쎄요. 그건 숙제.”
그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부터 그는 죽으라고 가시나무를 명장사에 날랐다. 자연스럽게 그녀와 가까워졌다. 그는 그녀에게서 글자를 배웠다. 땅바닥에 막대기로 글자를 그렸다. 재미가 있었다. 글자를 배우는 재미보다는 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별을 보았다. 여태 하늘에 그렇게 많은 별이 있는 줄 몰랐다. 그는 비로소 꽃을 보았다. 그렇게 산을 돌아다니면서도 산에 그렇게 많은 꽃이 있는 줄 몰랐다.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자주 바라보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그는 얼핏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왜 자신이 이 산골짝에 있는지를 묻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떠올렸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일상이었다. 그는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죽음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잠 못 이루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이구의 마음은 서서히 나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지게가 싫었다. 도끼가 싫었다. 항상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그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벼랑으로 가고 싶었다. 순전히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녀로 인해서 고통을 샀다.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그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것만이 그녀를 완전하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구는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고, 형제들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만 되는가. 그는 고개를 흔들게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질서를 거역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자고 나면 언제나 가족들의 얼굴을 살폈지만, 이제는 가족들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커다란 변화였다.
이구는 조심스럽게 불경을 손에 잡았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밤낮으로 매달렸다. 이구는 마을의 몇몇 동무들이 읽는 언문을 익혔고, 한문을 배웠다. 그 사이 또 다음 해의 가을이 다가왔다. 그때까지 그는 명장사 근처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구는 그녀의 동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묻지도 않았고, 누구에게 듣지도 않았지만 그야말로 바람결에 그는 그녀의 소식을 몽땅 듣고 있었다. 어떤 큰스님의 딸이라는, 혹은 어떤 큰스님의 둘째 부인이라는. 그리고 그녀가 회산 스님과 이상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의 고운 모습은 여전히 이구의 가슴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봄이 오는 길목, 드디어 그녀와 함께 여름을 보았고, 그리고 가을도 보았다. 또 그리고 얼음을 보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를 찾아 명장사로 갔다. 그는 그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삽화 염정우
마침내 이구가 명장사 마당에 이르렀을 때 대웅전에서 그녀의 독경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웅전 문을 활짝 열었다. 옥아가 앉아 있었다. 그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씨 스님,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구의 몰골은 처참했다. 잠깐 사이에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 피로 얼룩진 옷, 짚신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도리도 없었다. 옥아의 얼굴에도 핏기가 없었다. 그저 망연히 이구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구도 오직 옥아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이구의 눈이 아래로 깔렸다.
“아버지도 죽였습니다!”
옥아의 양미간이 흔들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감당할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옥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구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법당문을 막고 서 있었다. 옥아는 알고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어차피 이구는 무슨 일이든 벌일 태세였다. 이구가 그렇게 간청할 때 북간도로 떠났다면...... 옥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아씨 스님!”
이구는 마침내 문지방에 엎어졌다. 그의 흐느낌 소리가 대웅전을 울렸다. 추녀 끝에서 풍경이 울었다. 하늘과 땅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집을 찾지 못한 산새들이 푸드득거렸다. 그리고 밤하늘에 별이 나타났다.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구는 엎어져서 일어날 줄 몰랐다.
이구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 옥아가 여전히 앉아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이구의 얼굴엔 어제까지의 늠름하던 마을 제일의 나무꾼 이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갈 곳 없는 들짐승처럼 이구는 떨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올 거예요.”
그렇지만 이구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옥아에게 자신의 가장 약한 꼴, 가장 처참한 꼴을 모두 보이고 싶었다. 이구는 법당문을 가로막고 울었다.
“여기 이 자리에서 사람들의 몽둥이에 맞아 죽을 겁니다.”
“처사님!”
옥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면 나이 어린 내 형제나 조카들의 손에 죽을 겁니다. 여기서!”
마침내 이구는 울부짖었다. 옥아가 다가왔다. 그녀의 두 손이 그의 볼을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이구와 옥아의 눈물이 작은 봇도랑을 만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옥아가 그의 얼굴을 가슴에 안았다. 떨고 있는 그의 몸 전체를 안았다.
“북산으로 가세요.”
“북산?”
“어디에?”
“개마고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