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향기로운 꽃이 피려면
일러스트 정윤경
마중물 생각
창호가 새벽빛으로 푸르게 물결치고 있다. 아래 절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 산방은 절 위 계곡에 있으므로 조그만 소리도 크게 공명이 되어 올라온다. 아마도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사람들이 해맞이를 하러 산길을 나선 모양이다. 나는 해돋이를 보러 굳이 산정으로 가지 않는다. 내 산방 건너편 산자락에 오르면 계당산 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계당산은 내가 은거하듯 살고 있는 화순군과 보성군을 경계 짓는 꽤 높은 산이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인생을 사유하게 하는 산이다. 계당산 허공의 빗방울은 화순군에서 불어 가는 바람을 만나면 보성강으로 갔다가 섬진강이 된다. 반대로 그 빗방울이 보성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면 화순의 지석강을 흐르다가 영산강에 섞인다. 어느 바람과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 빗방울의 운명이 갈리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길이 크건 작건 달라진다고 본다.
심혼에 불을 당겨주는 스승이나 좋은 친구 덕분에 인생길이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단비와 같은 인복(人福)이 없었다면 내 삶에 꽃이 피기는커녕 흑풍(黑風)이 부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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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었습니다. 세월에 금이 그어져 낡은 것과 새것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듭거듭 향상과 형성의 길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날을 만들고 달을 만들며 해를 만들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요즘 세상은 현기증이 날 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게 격변해가고 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지 않고는 내가 내 인생을 자주적으로 꾸려가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불쑥불쑥 예고 없이 닥치는 일들을 대처하고 극복하는 데에 번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인지, 어떤 선택이 지혜로운 결단인지 제대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바른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가치판단의 기준이 있으면 크게 흔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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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종교 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확신이요, 신념입니다. 종교가 열어 보인 바른 가르침을 굳게 믿고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평소에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쳐보아야 비로소 내 믿음이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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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일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끝없는 개선과 창조의 생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동물의 생존이나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어떤 변화를 통해서 사람은 거듭거듭 형성되어 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 하루하루 무엇인가 이루어지고 되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목적이 아니고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도착이 아니라 어디로 향해서 가고 있는 노정(路程) 그 자체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 노정이라면, 뚜렷한 방향이 설정되어야 합니다. 방향이 설정되지 않으면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허둥대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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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인생을 살면서도 자주적인 삶을 이루지 못하고 누구에겐지 떠밀려서 또는 무엇에 휩쓸려 살았던 날들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세워야 할 뚜렷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를 불교적인 말로 원(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심과 원은 다릅니다. 욕심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원은 나만이 아니라 남에게까지도 덕을 입히는 이타적인 소망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마다 자기 처지에서 갖게 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자기 한 사람이나, 가족 단위에 그친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내 이웃과 사회에 널리 펼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청정한 원이 됩니다. 원은 이렇듯 만인이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랑의 작용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이 바람에 쏠리고 저 바람에 기울어지며 온갖 상처를 입으면서 살아온 것은 투철한 생의 지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득이 될 수 있는 원을 세워 순간순간을 그같이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들의 하루하루는 향기로운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큰 것 속에는 작은 것이 들어갈 수 있지만 작은 것 속에는 큰 것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넓고 큰 원을 세워야 합니다.
갈무리 생각
며칠 전, 저녁식사 겸 술자리에 초대를 받아 읍내에 나갔다. 한 달 전부터 내 책의 애독자인 지인이 간곡하게 부탁해서 참석한 자리였다. 지인은 최근에 펴낸 <법정스님 인생응원가>도 서명을 받아 갔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어색한 자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컴컴한 도로를 달려 내 산방으로 돌아오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식사하기 전 모두가 와인 술잔을 든 채 갑자기 나더러 ‘덕담 한 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적잖이 당황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세월은 가는 것인지 오는 것인지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세월이 간다고 여기면 아쉬운 마음이 들 것이고, 세월이 온다고 느끼면 가슴이 설레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여러분 모두가 가슴 설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나야말로 가슴 설레는 한 해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벅찬 기쁨의 한 해가 되려면 먼저 내 삶의 원(願)이 확실해야 하고, 좋은 인연이 이어지고 깊어져야 하고, 천직인 ‘글농사’를 한눈팔지 말고 부지런히 지어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