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전
범종각 오른편으로 가깝게 미륵전이 있습니다.
법당과 같은 터에 종각을 세운다 해도 두 건물에 간격을 두는 것이 상례인데, 미륵전과 종각이 이렇게나 가깝게 붙어있는 까닭은 산세가 너무 가팔라 널따란 터 조성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륵전(왼쪽)과 범종각(오른쪽)
미륵전은 맞배지붕, 겹처마 형식으로 지어진 한 칸의 검소한 법당입니다. 부처님을 모시는 좁은 한 칸 집이 송구스러워, 격을 높이려고 이익공을 올렸고 그래서 생겨난 포벽에 여섯 분의 부처님을 그렸습니다.
극락전. 한 칸 집에 입힌 단청과 꽃살로 장식한 분합문이 아름답습니다.
미륵전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1호로 지정(2002.9.16.)된 석조여래입상을 봉안하였습니다. 안내판에는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은 신라시대에 조성하였으며, 지금의 용덕사 아래 묵리 저수지부근 신라시대 거밀현 관아에서 모시던 불상으로 추정된다”라 쓰여 있습니다.
현재에 남아있는 신라시대 건축물이 없는데 저수지 부근에 신라시대 관아가 있었다는 것을 어찌 알았고, 그 관아에서 불상을 모셨다는 추정은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 관아에서는 왜 불상을 모셨을까하는 의문이 꼬리지어 생겨납니다.
석조여래입상. (부처님의 몸에 장난삼아 동전을 올려놓는 행위는 부처님을 가볍게 여기고 천대하는 행위인 까닭에 오랜 겁에 걸쳐 고통을 받게 됨을 모르는 분들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불상은 닦아낼 수 없을 정도로 물때가 두텁게 앉아서 한 눈에도 오랜 세월동안 물에 잠겨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양쪽 귀는 조성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나 눈과 코는 시멘트로 복구하였고, 허리 부근에는 떨어진 몸을 돌아가며 이은 흔적이 남았습니다.
정수리에는 육계가 낮게 올랐고 미간에는 백호를, 목에 새긴 삼도 주름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새겼습니다. 통견의 가사는 앙가슴 쪽으로 흘러 “U”자형을 이루었고, 넓은 소맷부리는 주름져 무릎까지, 길게 내려온 섶은 발등에 닿았습니다.
불상의 왼손은 손가락 끝이 아래 방향으로 향한 채 손바닥을 밖으로 내보이는 여원인을, 오른손은 용화수 꽃봉오리를 살포시 잡아 가슴까지 들어 올렸습니다. 불상이 취하고 있는 수인에는 ‘불사를 일으킨 스님부터 시주에 동참한 많은 중생들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건대 여원인은 미륵불께서 중생이 원하는 바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용화수인은 성불하신 후 펼치시는 용화수 법회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미륵불상을 바라보며 사후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지만 살면서 미륵보살을 본 사람이 있으니, 바로 선재동자입니다.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보리심을 키우는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이 가지가지 형상을 나타내며 천상의 사람과 사바세계 중생들을 교화하는 광경을 봅니다. 선재동자는 그곳에서 ‘보리심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니, 누구나 보리심을 내면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게 된다’는 말씀을 듣게 되는데, 미륵전에서 이 말씀을 생각하신다면 용화수 아래에서 펼치는 미륵부처님의 법문을 미리 듣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미륵전 네 개의 기둥에 미륵불을 찬하는 글이 주련으로 걸렸는데, 선재동자가 아닌 다른 누구인가 미륵불께서 이곳 염부제에서 자비를 베풀고 계신 것을 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시설법무휴식 삼회도인비등한 절염로생침오략 금소약잠도인간
(六時說法無休息 三會度人非等閑 切念勞生沈五濁 今宵略暫到人間)
하루에 여섯 번 법문을 하심에 쉬는 때가 없으시고
사람을 제도하심에도 소홀히 여기는 일이 없다네.
오탁악세에 빠진 중생을 간절히 생각하시어
오늘밤 잠시 인간세상 들르셨네.
나한상
석조여래입상 후벽에는 나한상 여럿을 모셨습니다. 나한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부터 미륵부처님이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며 중생들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고, 불법을 지켜내는 분이기에 불자들에게 공경을 받아야 하는 분들입니다. 법당에 모신 나한님이 몇 분인지 세어보지 않았고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천이백 제대아라한” 중 어느 분인지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정하시고 또 부촉하신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나한님들을 미륵부처님과 같이 모신 것은 ‘어리석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인계인수해 주십사하는 의미다’라는 우스꽝스럽고 엉뚱한 생각이 났습니다.
미륵부처님과 나한.
정교하지 않은 몸체에 하얀 회칠을 한 다음, 투박한 선으로 표정을 만들고, 옷 색을 입히고, 손 모양과 자세를 잡았습니다. 벗겨진 회칠 아래 다른 색의 회칠이 보이고, 먼지 때가 얼룩진 것에서 상당히 오래 전에 조성되었음이 짐작됩니다. 나한상을 빗어낸 모양이 세밀하지 않고, 표면 회칠이 깊게 떨어져나간 부분에 보이는 색깔을 보건대 소재는 돌로 짐작됩니다. 나한상의 크기가 들쑥날쑥한 것으로 보아서 석공(石工)은 여럿이고, 표정과 옷 색을 입힌 솜씨가 모두 비슷비슷해 화공(畫工)은 한 명일 것 같습니다.
세상살이의 갖가지 표정을 짓고 계신 까닭에 더 친근함을 갖게 됩니다.
나한상이 불보살상과 다른 점은 얼굴이 지어낸 표정입니다. 나한은 불보살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성취하였지만 위엄과 자비스런 얼굴보다는 중생들이 살아가면서 짓는 희로애락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웃기보다는 얼굴이 찢어질 듯 웃고, 불의를 참지 못해 미간 주름과 눈썹을 곧추 세우며, 눈꼬리와 입술 가장자리를 아래로 처트리는 슬픈 표정은 나한만의 특권이고, 이는 나한이 항상 중생 곁에 친근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륵전 벽화
사찰 방문에 흥미를 돋우는 것의 하나는 법당 외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는 재미입니다. 법당을 장엄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려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 신앙심을 더욱 깊어지게 하며, 해당 사찰과 관련된 내력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미륵전 외벽에 그려진 그림 중 하나는 넓은 광야를 헤매던 사나이가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려 깊은 낭떠러지에 칡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버텨내는 그림입니다.
사나이가 매달린 낭떠러지 아래에는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리고, ‘살아났구나’하는 안심은 잠깐이고 어느새 나타났는지 생명줄인 칡넝쿨을 흰 쥐가 갉아댑니다. 사나이 목숨은 순간순간 줄어들고 있습니다.
원래의 설화에 나오는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꿀을 삼킴으로써 잠깐의 단맛에 위태로움을 잊는다’는 내용이 생략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많이 들어온 이야기이며 보아온 그림이지만 마주하고 있는 세상살이가 거칠고 무상함을 담고 있어서, 볼 때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게 합니다.
또 다른 그림 하나는 미륵불상을 세우는 내용으로 논산 은진미륵불상을 세우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땅이 크게 울리며 거대한 돌이 솟아오르자, 조정에서는 하늘의 뜻이라며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을 조성하기로 합니다. 솟아오른 돌은 하반신을 제작하고, 이웃에서 큰 돌을 옮겨와 머리와 가슴 부분을 조성했지만 올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불상세우는 책임을 가진 스님 앞에 아이들로 현신한 문수보살이 불상세우는 기묘한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용덕사 미륵불상이 은진미륵만큼 크지는 아니하여도 천지간 조화와 인연으로 모시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그림이라 생각됩니다.
-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