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승려 혜초가 지은 기행문의 제목은?’이라는 문제의 답을 왕오천축전, 혹은 왕오천국전이라고 적어놓고는, 1300년전 입적한 혜초를 죽어라 원망하는 애들이 한반에 꼭 한둘 씩은 있었다. 그나마 공부 꽤나 한다는 애들은 ‘왕∨5∨천축국∨전’이라고 문맥을 나누어 외었지만, 상당수는 통째로 후루룩 외우다가 한 글자를 빼먹기 일쑤였다.
이렇듯 『왕오천축국전』은 세계사 시험의 단골 주관식이었을 뿐, 거기에 무슨 내용이 담겨져 있는지, 그 책이 어디에 소장돼 있는지는 관심 밖의 문제였다. 이 책의 번역본도 거의 없을뿐더러, 중고등학생들이 한글대장경 184권에 실려있는 번역을 찾아볼 리 만무했으니….

우리를 자주 골탕 먹이던 『왕오천축국전』이 은해사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의 역주로 다시 부활했다. 스님들을 가르치는 사부들의 큰사부, 조계종 최고의 강주로 알려진 지안 스님이 『왕오천축국전』을 번역했다는 소식은 사실 조금은 의외의 뉴스였다. 지안 스님은 우리에게 초발심자경문, 표준 금강경 등과 같은 묵직한 경전의 번역자로 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이미 10년전부터 이 책의 번역을 계획해왔다고 설명했다.
“1988년 처음으로 인도를 다녀온 뒤부터 9번 인도를 다녀왔어요. 부처님께 귀의한 출가자로 경전을 공부해온 나로서는 인도가 낯선 이방의 나라가 아니라 경전 속의 고향 같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인도를 통해서 불교적인 향수를 깊이 느끼기도 했지요. 나는 인도에 갈 때면 꼭 인도여행기를 한 권씩 들고 다녔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마음에 강한 여운을 남겼어요. 법현의 『불국기』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달리 내용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특별이 흥미를 끄는 대목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달밤에 고향길을 바라본다는 혜초의 향수 어린 시를 읽다가 애틋한 연민 같은 것을 느끼면서 왕오천축국전 전문을 새롭게 번역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1943년 육당 최남선이 삼국유사 부록에 왕오천축국전 원문을 실은 이래 이석호, 이영무, 한정섭, 정병삼 등이 번역본을 출간했고 최근에는 정수일 교수가 2004년에 번역본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스님이 이 책의 번역본을 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불교 한문의 대가로 알려진 지안 스님의 책에서는 기존의 번역물들을 뛰어넘는 수려한 문장이 돋보인다.
“올해 12월 세계 최초로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을 나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다고 하던데, 혹시 그 때를 맞추어서 번역하셨냐”고 묻자 스님은 “이미 10년전부터 번역을 조금씩 하다가 2년전에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했는데, 올해 3월에 출판사로 탈고를 넘겼다”며 “올 여름에 그 소식을 듣고는 무척 반가웠다”고 말했다.
지안 스님은 “아무래도 혜초 스님이 그동안 번역하느라 수고했다고 나를 칭찬해 주시기 위해 친히 오시는 것 같다”며 함박 웃음을 터트렸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는 8세기경 신라의 스님으로 중국을 거쳐 인도로 순례를 떠났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20세기 초반까지 한국인들은 혜초가 누구인지, 왕오천축국전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돈황의 천불동 제17 석굴을 탐사하던 중 동굴 천장에서 낡고 오래된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하면서 1200전 혜초라는 스님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8세기경 불공 삼장의 제자인 한 밀교승이 인도를 답사하면서 적은 기록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15년 다카쿠스 준지로라는 일본 학자에 의해 혜초가 신라 스님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카쿠스 준지로가 밀교의 중요문헌인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광화상표제집』에 수록된 불공 삼장의 유서를 보고 혜초가 신라사람임을 확임하게 된 것이다. 그 유서에는 “내가 지금까지 30여년간 밀교의 비법을 전해 여러 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금각사의 함광, 신라의 혜초, 청룡사의 혜과 등이다”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현재 전해지는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스님이 쓴 원본이 아닌 축약본으로, 그 내용이 매우 간략하고 유실된 부분이 많아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편의 시들이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은 고향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들이 녹아있다. 지안 스님의 수려한 문장으로 다시 태어난 시 가운데 우선 한 편을 먼저 감상해보자.
그대는 서쪽 이역이 멀다고 한탄하지만
나는 동쪽이 길이 멀다고 탄식한다네.
길은 험하고 산마루엔 눈이 잔뜩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 길엔 도적떼가 들끓고
새도 날다가 솟아 있는 산봉우리에 놀라며
사람은 가다가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도 건너야 한다네.
평생 눈물을 훔쳐본 적 없었는데
오늘따라 하염없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구나.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세계 최초로 12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다고 하니, 지안 스님의 번역본이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라 하겠다.
이 책의 또 한가지 매력은 불광출판사의 정성 어린 편집이다. 왕오천축국전의 두루마리 원본 내용이 책 표지부터 시작되어 책 뒷면까지 계속 이어져 두번째장까지 이어짐으로써 원본의 매력까지 함뿍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