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정윤경
게으름은 쇠를 갉아먹는 녹과 같다
게으름은 최대의 악덕입니다. 게으르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법구경>에서는 게으름을 쇠에 나는 녹에 비유합니다. 심성을 강철에 비유하고 게으름을 녹에 비유합니다. 쇠를 침식하는 것이 쇠에 난 녹입니다. 아무리 강철이라도 녹이 슬기 시작하면 그것은 쇠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심성과 영성, 불성이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게으르면 다 매몰되어서 인간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녹은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의 한 생각에서 나옵니다. 게으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길을 갈 때 매우 천천히 걷곤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천천히 걷는 이유를 묻자 부처님은 말합니다.
“걷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가르침이다. 언제나 한겨울 개울물 속으로 걸어들어 가듯 걸으라. 물이 아주 차갑기 때문에 천천히 깨어서 걸어야 한다. 물살이 아주 빠르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개울의 돌에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에 한 발 한 발 지켜보아야 한다.”
인생은 빠르게 흘러가는 차가운 물살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물살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욕망과 번뇌의 돌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인간을 ‘푸루샤’라고 하는데, 이것은 ‘힘을 소유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힘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괴로움과 번뇌에서 해탈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힘을 자기 내면에서 찾아야 합니다. 한 줄기 빛은 천년 동안 쌓여 있던 어둠을 단번에 날려 버립니다. 마음이 깨어 있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부처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매 순간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이미 부처입니다.
사족의 말
1.
나는 산중으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한동안은 게을렀다. 중국의 선사처럼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하는 생활을 탐닉했다. 서울생활의 자의반 타의반으로 살았던 독을, 오랜 직장생활의 강박적인 습관을 그렇게 풀었다. 그것도 나를 해방시키는 치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내가 게으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는 새벽에 창문을 열었는데, 다랑이논밭에 산중농부들이 나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무얼 하고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장날을 기다렸다가 30리 떨어진 면소재지로 가서 호미를 하나 사왔다. 그런 뒤 그 호미를 내 방 벽에 걸었다. 호미는 내 화두가 되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새벽부터 글을 쓰는 습관을 들였다. 농부는 논밭농사를 짓고 나는 글농사를 짓는 셈이었다. 지금도 새벽부터 오전까지 글을 쓰고 있는데, 그때 들였던 습관이다. 어느 잡지사에서 호미를 사진 찍어 소개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호미를 벽에서 내리고 말았지만. 내 산방을 찾은 손님들이 그 호미부터 찾았기 때문이었다.
2.
게으름을 경계한다는 것은 눈을 뜨고 있다는 의미일 터이다. 그렇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눈을 뜬 사람’을 붓다라고 한다. 초기경전에는 ‘부처’라는 말은 없다. 다만 ‘눈을 뜬 이’ ‘거룩한 이’라는 말만 있을 뿐이다. 부처를 ‘눈을 뜬 이여!’ 혹은 ‘거룩한 이여’라고 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