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익진 박사(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의 저서 『현대한국불교의 방향』을 요약 게재합니다.
정토왕생(2)
정토사상은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왕생’이라는 개념이 다시 정토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술어가 되는데, 글자 그대로 그것은 ‘가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가서 태어난다’는 말은 ‘간다’는 말과 ‘난다’는 말이 복합된 것이다. ‘간다’는 것은 예토에서 타방 정토에로 가기 때문이다. 미타의 서방정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정토는 우리들의 사바 예토를 중심으로 방위가 표시되어 있음이 예사이다. ‘난다’는 것은 정토에서 새로운 출생을 받기 때문이다. 정토 왕생은 인간의 임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토는 찬란한 낙토(樂土)로써 묘사되고 왕생은 임종 후의 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정토 교학에서는 이러한 정토설을 ‘지방입상(指方立相)’이라고 말한다. 방위를 지시하고 장엄상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지방입상적인 정토설을 용납할 수가 있을까. 반야개공(般若皆空) . 일체불가득(一切不可得)의 견지에서 볼 때 정토장엄이나 임종왕생과 같은 교설을 글자 그대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정토사상가들 사이에서는 반야사상과 정토교설과의 이러한 모순을 화해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정토가의 그러한 시도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토를 수행자의 마음에 나타나는 해탈계로 보려는 입장이다. 용수에 의하면 정토는 부정잡악(不淨雜惡)이 사라진 중도실천의 묘과(妙果)이며, 무착과 세친에 의하면 불삼신(佛三身) 중의 수용신(受用身. 報身)이 머무는 보토(報土)인 것이다. 예토와 정토를 마음 하나로 보는 선가(禪家)의 유심정토설(唯心淨土說)은 이러한 정토관을 궁극에까지 밀고 간 것이다.
이러한 정토관에 의할 때 정토와 예토는 공간적으로는 동일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다만 주관적인 심식(心識)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정토장엄상도 공(空)과 가(假)가 상즉(相卽)하는 원리로 이해하게 됨은 물론이고, 담란이 말하는 바와 같이 왕생도 ‘불왕(不往)의 왕(往)이요, 불생(不生)의 생(生)’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토관은 정토교설과 반야사상의 갈등을 해소하여 정토교를 선양하는 데에 뜻이 있었음을 물론이다. 그러나 정토를 단지 유심적(唯心)으로만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경계해야 한다. 정토교는 본래 자기 힘으로는 해탈을 실현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한 범부를 상대로 부처님의 자비가 베풀어준 교설이기 때문이다. 세친은 정토장엄을 ‘부처님의 원심장엄(願心莊嚴)’이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 뜻을 우리는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