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고익진 지음
병고(丙古) 고익진(1934~1988, 전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은 근현대 한국불교학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불교학자이다.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는 한국불교학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불교학자라는 위상을 고수하고 있다. 그가 최고의 불교학자로 부동의 위치를 견지하고 있는 결정적 이유는 아함경 연구를 통해 한국불교학계의 흐름을 뒤바꾼 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말하는 ‘사건’이란 바로 고익진의 석사논문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라는 획기적 논문의 출현을 말한다.
이 논문이 발표되기 전까지 아함경은 그저 초보자 또는 하근기(下根機)들이나 보는 소승경전에 불과했다. 이러한 잘못된 흐름을 바꿔놓은 인물이 바로 고익진이다. 의과대학 재학생이었던 고익진은 불교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 석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바로 이 논문이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1971년)다.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논문도 부분적으로 한계가 없을 수 없겠지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쇼킹한’ 논문이었다.
고익진은 이후 아함경 연구를 지속했고, 이로써 아함경에 기록된 부처님 말씀에 일관된 체계성이 있음을 체계화했다. “대승불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아함이요, 아함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 대승이다”라는 사실을 파악했고, 이것이 역저 <한글 아함경>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50년 전, 불교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문제의 석사논문은 지난 2002년 동국대출판부에서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출간 이후 이 책은 불교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필독서가 되었다. 한 블로거는 이 책에 대해 “평생 동안 곁에 모시고 두루 두루 살펴보며 그 뜻을 파악하고 음미해야 하는 책”이라는 리뷰를 붙이기도 했다.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증보판이 생전 고익진의 제자들이 모여 결성한 ‘담마아카데미’에 의해 최근 다시 발간되었다. 불교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 책은 결코 신간일 수 없겠으나, 새롭게 단장하고 세련되게 편집돼 신간으로 소개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
“불교를 처음으로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나는 아함에서부터 읽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불교 입문서나 불교학개론이 불교를 처음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맨 처음에 추천되는 책들이지만, 이런 책들은 여행에 들어서서의 실제적인 '길'은 아니다. 아함은 불교라는 긴 여로의 맨 처음에 밟아야 할 길인 것이다. 불문에 들어와 이미 상당한 조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의 불교가 어딘지 모르게 허점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이런 분에게도 나는 아함에서부터 다시 읽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아함은 모든 불교학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대소승의 모든 불교사상은 원시불교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아함은 원시불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고익진은 ‘불교학은 아함에서부터’라는 제목의 이 책의 머리말에서 아함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렇다. 아함에 대한 연구 없이는 불교학의 기초는 다져질 수 없다.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아함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한국불교계에서 법화나 화엄과 같은 높은 수준의 경전에는 관심을 보이면서도 그러한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아함에 대해서는 소홀한 경우가 여전히 허다하다. 대승의 근간이 아함이라고 할 때, 아함을 건너 뛴 어떤 것도 사상누각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재세 시는 물론,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2,3백년 까지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문자에 정착되기는 부파불교 시대에 경율론(經律論) 3장의 성립이 이루어지면서 부터다.
이후 부처님의 교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런 움직임은 이내 교단 내에서 견해차를 발생시켜 이것이 부파형성의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럴 경우 이견(異見)의 대립 속에 구전되어온 교설이야 말로 움직일 수 없는 권위로 내세워질 수밖에 없다. 고익진이 “경장(經藏)을 특히 ‘아함’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함이 당시에 얼마나 중시된 경전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고 언급한 이유다.
아함교설의 체계성을 밝히기 위해 이 논문(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이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십이처(十二處), 육육법(六六法), 오온(五蘊),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네 가지 유위세간(有爲世間)의 법문들이다. 이 논문은 첫째, 각 법문 자체적으로 독자적인 교리조직을 갖고 있고 둘째, 그들이 다시 전체적으로 놀라울 만큼 정연한 교리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십이처’ 법문은 우리의 주관과 객관의 인식관계를 근거로 시설된 것이지만 거기에 다시 중생과 자연 사이의 작용·반응의 인과관계까지를 나타낸다. 고익진은 “중생과 자연사이의 이러한 인과율이 업윤회설의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이론적 기초가 된 것임에 틀림없다”며 “이 둘은 결합하여 하나의 교리조직을 이루는데, 이것을 ‘세간법의 체계’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논문은 이어 “육육법이 십이처에서 분립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육식의 발생에 있으며, 이 육식의 대상은 유위법의 주이상(住異相)에 대한 것”이라며 “전후 두 법이 완전히 다르다고 식별[變異]하면 필연적으로 전법은 멸하고 후법은 생하는데, 이것이 불교 특유의 주이관(住異觀)으로서 수론학파 등의 전변설과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변이의 전후 두 법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그러나 전법은 후법 발생의 필수조건의 하나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전후 두 법 사이에는 연고(緣故) 관계가 있고, 이러한 연고관계에 의거한 생멸의 개념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 마침내 유위법의 실상의 구조가 밝혀져 십팔계(十八界)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논문은 ‘육육법은 육근·육경·육식으로 이루어진 전반부와 육촉(六觸)·육수(六受)·육애(六愛) 등으로 이루어진 후반부로 갈라진다’고 파악하고, 육육법의 전반부는 십팔계 성립의 기반이 되며, 그들에 대한 ‘진여실상계’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후반부는 십팔계를 연하여 일어난다고 아함은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며 따라서 육육법의 후반부는 ‘십팔계를 근거로 한 연기’라고 기술한다. 그런데 아함은 다시 (육육법의) 후반부의 최초 지분인 육촉을 ‘삼사화합(三事和合)’, 즉 ‘육근·육경·육식의의 화합이라고 설해 전후로 단절되었던 육육법을 다시 연기론적 연쇄로 회복시킨다고 파악한 이 논문은 따라서 “육육법은 전체적으로 십팔계를 근거로 한 연기가 되고, 십팔계는 그러한 유위세간에 대한 진여법계가 된다”며 육육법과 십팔계가 연기론적 교리조직을 이루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논문은 계속해서 ‘오온’과 ‘십이연기’에 대한 연기론적 교리조직을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아함의 모든 교설은 궁극적으로 십이연기에 이르러 완성된다고 밝히고 있다. 십이연기 이전의 모든 교설은 십이연기를 설하기 위한 또는 십이연기에 유도하기 위한 예비적 방편시설이었으며, 논리적 전개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육식에서 발단한 아함의 실상론은 십팔계·육계를 성립시켰지만 궁극적으로는 명(明)에 이르러야 하고, 십팔계·육계가 육육법·오온에 대한 진여법계에 해당하지만 무상·고·무아로 배척된 것은 이 때문이며, 부처님이 장야에 뗏목의 비유를 설하신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 이 논문은 “십이연기는 아함의 구경(究竟)이요, 완성(完成)이요, 묘법(妙法)”이라고 결론짓는다.
아함은 이러한 교리체계에 입각해서 제법개공, 즉 ‘연기한 것은 공’임을 부르짖지만, 연기는무명이 있는 한 아(我)가 있으므로 무(無)도 아니고, 무명이 멸하면 아도 멸하므로 유(有)도 아닌, 즉 유무를 떠난 중도라는 데까지 논의를 진전시킨다. 대승불교의 반야개공(般若皆空)은 아함의 이러한 이론을 기초로 성립한 것이며, 따라서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아함에서부터 이론적 기초를 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논문을 강조한다.
고익진은 이 논문을 통해 흔히 아함의 교설을 단순한 수의설(隨宜說), 즉 사람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게 설한 것으로 보고 거기에서 논리적인 체계를 찾으려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자 속단임을 밝히고, 아함의 수의설 속에 놀라운 의미연관의 체계가 들어있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밝혀냄으로써 한국불교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를 일궈낸 것이다.
한편 이 책에는 ‘아합법상의 체계성 연구’ 논문 외에도 ‘반야심경에 나타난 연기론적 교설에 대하여’, ‘원시불교의 외도론’ 등 2편의 주옥같은 논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부록으로 ‘지송아함경’을 한글본·한문본·빨리어본으로 첨부해놓았다.
고익진은?
병고 고익진 교수는 한국불교학계가 초기불교에 눈을 뜨게 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의대 재학생이었던 그는 불교학에 뜻을 둔 이후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70년에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라는 석사논문을 통해 불교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74년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본격적인 불교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고 교수는 이후 한국불교가 지닌 병폐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1980년대 동국대 <한국불교전서> 편찬실장을 맡아 한국불교와 관련된 방대한 문헌들을 시대 순, 저자별로 일목요연하게 집성함으로써 한국불교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일상생활 속 수행을 강조했던 그는 1981년 한길로 가는 보살회란 뜻의 ‘일승보살회’를 창립해 젊은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0년대 중반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심장병이 재발, 55세 되던 해인 1988년 10월17일 생을 마감했다.
주요 저서로 <현대한국불교의 방향>, <한국의 불교사상>, <한국찬술불서의 연구>, <한국고대불교사상사>, <불교의 체계적 이해>, <한역 불교근본경전>, <하느님과 관세음보살>, <고익진 교수님이 들려주는 불교이야기>, <한국의 사상>(편저), <한글아함경>(편저)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원효의 진속원융무애관과 그 성립이론’, ‘원효사상의 실천원리’, ‘삼국시대 대승교학에 대한 연구’, ‘한국불교철학의 원류와 전개’, ‘별역잡아함의 문헌학적 중요성’, ‘반야심경에 나타난 연기론적 교설에 대하여’, ‘불교윤리와 한국사회’, ‘종교간의 대립과 불교의 관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