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사상과 문화>
고(故) 김상현(金相鉉,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신라인과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불교에 관심을 가진 건, 심오한 철학이나 그들이 불교를 한 차원 높은 사상으로 승화시켰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 교수는 신라인들이 겪었던 희망과 좌절, 슬픔과 기쁨, 종교적 열정과 경건함에 주목했고, 마침내 케케묵은 고서와 유물 속에서 그들을 불러내 여전히 살아 숨 쉬게 만든 놀라운 업적의 당사자이다. 올해로 발간된 지 꼭 20년이 지난 <신라의 사상과 문화>(일지사, 1999)는 김 교수가 20여 년간 신라인의 삶과 사상을 느끼고자 고군분투했던 이 같은 작업의 편린들이다.
사실 김상현이라는 우리 고대사 연구의 위대한 석학이 탄생한 데는 많은 스승들의 지도와 후광이 있었다. 필자와도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김상현 교수는 생전에 자주 효당 최범술(曉堂 崔凡述) 선생을 회고하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두터운 인연을 맺은 효당 선생에게서 저자 김상현은 큰 영향을 받았다. 김 교수가 신라 연구에 매진한 것은 전적으로 신라의 고승 원효를 존경해 자신의 호를 효당으로 지었을 정도로 원효를 존경했던 최범술 선생의 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효당의 영향을 받아 신라연구를 시작한 김 교수에게 원효학의 권위자 불연 이기영(不然 李箕永) 선생은 불을 지펴주는 역할을 해주었고, 황수영 선생은 학문적 열정을 일깨워주었으며, 차문섭, 정영호 선생은 가까이에서 그를 이끌고 지도해준 고마운 스승들이었다. 그러니까 <신라의 사상과 문화>라는 역저가 탄생한 배경에는 이렇듯 많은 분들의 협조와 도움, 학문적 영감을 일깨운 지도가 있었다.
김상현 교수는 사학자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깊은 불연(佛緣)을 맺은 신실한 불자이기도 했다. 또한 소년시절부터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 소설가의 꿈을 간직했던 ‘문학 소년’이기도 했다. 게다가 공부를 하면서 황수영, 정영호 선생 등 저명한 문화재 전문가들과의 교유를 통해 문화재에 대한 전문가적 탁견까지 갖춘 ‘유별난’ 학자였다.
이런 성장 및 학문적 배경이 있었기에, 그가 일생을 통해 보여준 신라사상사와 불교사상사, 문화재를 해석하는 안목과, 이를 풀어내는 빼어난 글쓰기 등이 가능할 수 있었다. 신라사를 읽는 역사학자의 안목 위에 신라를 온통 지배했던 불교를 깊이 있게 읽어내는 능력이 뒷받침되어 수많은 뛰어난 논문들이 완성될 수 있었고, 역사와 종교(불교)를 아우른 이 책도 탄생할 수 있었다.
불교사연구라도 불교적인 시각만으로 조명할 수는 없다. 순수한 종교현상이란 존재할 수 없고, 그 어떤 현상도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종교적인 것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학자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사적 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곤 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불교사 연구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사항은 종교사적 이해라고 믿었다. 그의 이런 독특한 역사적 시각이 <신라의 사상과 문화>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김 교수는 진표 스님을 백제 부흥운동을 목표로 하는 반(反)신라적인 신앙운동의 기수로만 바라보는 천편일률적인 해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그를 출가동기와 삶의 행적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신선한 시각을 제공했다. 또한 종래 신라법상종의 시조가 진표나 태현이라는 학설을 뒤엎고 순경이라는 주장을 펴 학계의 관심과 눈길을 끌어 모았다. 또 사료가 크게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 있어 일본의 자료나 다른 사료들을 발굴해 법상종의 성립과 석굴암과 불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역저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묵직한 책 <신라의 사상과 문화>에는 이렇듯 신라인의 생각했던 삶의 가치와 희망, 고난을 극복하려던 그들의 지혜가 김상현이라는 석학의 프리즘을 통해 보석처럼 번득이고 있다.
<신라의 사상과 문화>에는 신라사상사에 관한 논문 20편이 수록되어 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는 신라 정치사상의 전개과정을 살피는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2부는 신라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제3부는 신라 불교사상의 사회적 전개에 대해, 제4부는 신라의 불교문화와 화랑전통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신라의 사상과 문화를 고찰함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불교사상적 관점에 의지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글도 있어, 책의 제목을 <신라의 사상과 문화>로 정했다고 김 교수는 밝히고 있다.
저자는 신라의 정치이념이 불교사상에 토대하고 있음을 고찰하면서 특히 자장(慈藏)의 정치 외교적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고 김상현 교수는 신라 중기에는 유교적 정치사상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왕실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하고 후원했음을 밝히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사상적 기반 또한 불교임을 논리적 근거에 의해 천명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풍류도를 수행하는 집단이면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한 화랑도 역시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황룡사 구층탑 건립과 사천왕사를 창건하는 등의 불교신앙은 당시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게 한 힘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불교사상은 초전불교와 업설(業說)을 비롯하여 계율 법화 화엄 미륵 등의 신앙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 원효사상은 별도로 간행할 예정이라 제외하였으나 불교사상의 사회적 전개 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하게 접근했다. 신라의 건탑(建塔) 관련 내용과 석굴암 불국사의 문헌자료를 검토하여 신라의 불교문화를 재인식하고 화랑전통 등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했다．
이 책은 저자가 책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처음부터 계획된 설계에 따라서 일관되게 쓰여진 글이 아니어서 체제의 통일에 있어서 아쉬운 감이 없지 않지만 신라사상과 문화를 주제로 한 역저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신라의 사상과 문화라는 방대한 제목에 부합될 만큼 전체적으로 다루어지지는 못했으나 기존의 불교사 연구가 대개 정치·사회사적 시 각만으로 다루어지게 된데 대한 반성과 함께 신라불교사를 종교사적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다룬 시도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또한 한국고대사 연구에 있어 크게 부족한 사료발굴에 많은 관심을 갖고, 탁월한 성과를 이뤄낸 저자는 이 책에서도 단편적이지만 신자료를 소개하고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우리의 조상 신라인들이 생각했던 삶의 가치나 희망은 무엇이며, 현실에 닥치는 위기와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 그리고 당시의 불교는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던가? 하는 등의 문제에 천착했다. 이 책을 나오게 한 저자의 이러한 관심사는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석학의 반열에 오른 저자는 동국대 문과대학장을 역임하는 것을 끝으로 정년퇴직해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평창동에 별도의 연구공간을 마련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지난 2013년 7월 21일, 돌연 입적했다. 그의 급작스러운 타계는 한국사학계는 물론 불교계에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신라 내지 한국의 사상과 문화를 동아시아의 다른 문화와 비교하여 그 특징을 밝혀는 연구’에 전념하겠다던 야심찬 의욕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을 지켜본 필자는 당시 그의 영정 앞에서 가슴이 메어지는 것을 느꼈다.
평창동의 한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나눴던 대화들, 그 많은 가르침들, 새로 마련한 연구실의 서재를 보여주며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설레는 눈동자를 한 채 설명하던 모습들이 지금도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무려나, 이 책에 수록된 논문 한편 한편이 모두 주옥같다. 다만 이 주옥같은 논문들의 제목을 열거하는 것으로 일찍 떠나간 고인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그리움을 달랜다.
‘국가의식의 성장과 정치이념’, ‘자장의 정치외교적 역할’, ‘신라삼보의 불교사상적 의미’, ‘만파식적설화의 유교적 정치사상’, ‘신라 중대 왕실의 불교신앙’, ‘신라인의 통일의지’, ‘통일 전야 신사사회의 기풍’, ‘풍류도론’,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 ‘사천왕사의 창건과 의의’, ‘신라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 ‘신라 초전불교의 여러 문제’, ‘신라 중고기 불교사상의 사회적 의의’, ‘자장 정률의 내용과 의의’, ‘신라 법상종의 성립과 순경’, ‘의적의 <법화경집험기>’, ‘,추동기>의 성립과 그 이본 <화엄경문답>’, ‘명창의 <해인삼매론>’, ‘진표의 미륵신앙’, ‘신라의 건탑과 <조탑공덕경>’, ‘석굴암의 문헌자료 검토’, ‘불국사의 문헌자료 검토’, ‘향과와 게송과 불교사상’, ‘화랑의 여러 명칭에 대하여’, ‘화랑 자료의 기초적 검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