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이 며칠 지속되더니, 이내 강마른 추위가 밀려왔다. 밤하늘의 달도 추위를 타는지 요즘 따라 병자처럼 파리하다. 대설(大雪) 다음날, 천지가 하얘졌다. 밤새 눈이 제법 내린 것이다. 살갗을 에는 미친바람이 살천스럽게 휘몰아쳤다. 마늘 밭을 덮은 비닐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뒤집혔다. 밤새 눈이 내렸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아 몰랐다. 새벽녘 드리워진 커튼을 젖히자 온통 하얀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늘 보던 정경인데도 눈 덮이니 참 예쁘다. 사람 마음이 이렇다.
대설 다음날 천지가 하얗게 눈으로 덮였다.
대설이었던 어제, 서리태 수확을 서둘러 마무리하지 않았다면 낭패를 볼 뻔했다. 서리태 수확을 끝으로 올해의 농사를 비로소 마무리했던 것이다. 서리태 수확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낫으로 베어 밭에 눕혀 말리고, 어느 정도 마른 서리태의 잔 이파리들을 일일이 제거한 후 마당으로 실어 올려 며칠 바짝 더 건조시킨 후 타작으로 수확을 마무리하기까지 20여일이 넘게 걸렸다. 그 기간 중에 비가 두어 차례나 내려 더욱 조바심을 일게 했다. 결국 우리 마을에서 가장 늦게 농사일을 마친 꼴이 되고 말았다.
아직은 초보 농사꾼이니 노련한 이웃집들 보다야 빠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콩알이 튼실하고 굵어 흐뭇했다. 더구나 우리 밭의 작물들은 모두가 친환경 농법으로 지은 것이어서 제초제와 농약 등을 ‘아낌없이’ 준 이웃 밭과는 그 격이 다르지 않은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까만 서리태 콩알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우리 부부가 땀 흘리고 마음조리며 정성껏 키워온 자식 같은 콩이다. 한 알이라도 유실이 되지 않게 타작을 한 마당 구석구석을 돌며 콩알을 주웠다. 그까짓 콩알 몇 개 더 줍는다고 부자가 되느냐며 핀잔주는 이도 있겠지만, 농사를 지어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콩 농사에서 최고 골칫거리인 개미허리 노린재는 트랩(trap)을 설치해 해결했다. 노린재가 좋아하는 페로몬 패치를 넣으니 트랩의 효과가 기대보다 좋아 노린재 피해는 미미했다. 타작은 지난해처럼 도리깨질로 하려고 시도했으나, 속도도 느리고 힘도 들어서 동네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전동 탈곡기를 빌렸다. 타작도 해볼수록 솜씨가 는다고, 2년째 해보니 처음 탈곡기를 대했을 때 가졌던 두려움도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런대로 폼도 나고, 일의 순서도 부드러워졌다.
서리태 타작에는 꼬박 이틀이 소요됐다. 기계를 사용했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힘들게 일을 하고나니 허리도 아프고 손가락도 접고 펴기가 부자연스럽다. 재미로는 몰라도 무리하게 농사일을 하다보면 골병든다는 몇몇 지인들의 걱정이 문득 떠오른다. 골병이 뭔가 했는데, 막상 뼈마디가 아프니 어떤 병인지 알겠다.
무제초제, 무농약의 친환경 농법으로 생산한 서리태라는 것을 안 친척과 지인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5킬로그램, 3킬로그램 등을 보내달라고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하긴 우리 집 세 식구 먹기에는 아무래도 양이 넘치니, 반갑고 좋은 일이다. 믿을 수 있는 친환경 작물을 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정성껏 지은 결실을 나누는 것은 내게도 그분들에게도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올해에는 지인들의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감자는 양이 부족해 원하는 분들 모두에게 보내주지 못했고, 고구마와 땅콩도 수확량이 적어 아주 소량만 나눠 먹을 수 있었다. 450평 크기의 작은 밭이고, 농산물로 판매로 생계를 삼는 입장이 아니니, 나눠먹기가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요즘 구경하기 어렵다는 태양초 고춧가루는 예상보다 원하는 지인들이 많지 않아 제법 많은 양이 남았다. 내년에는 부족했던 감자와 땅콩, 고구마 농사를 늘리고 고추농사는 아무래도 줄여야 할 것 같다.
눈이 내리니 현묘재 바깥은 고요하고, 안에선 콩고르는 손이 바쁘다.
사실 친환경 농사를 짓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집의 경우는 식구가 먹을 먹거리를 건강한 것으로 해야겠다는 것이므로 농사가 잘 되든, 조금 못되든 크게 상관할 일이 아니나, 농사를 주 수입원으로 하는 농부들에게는 친환경 농사를 유지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 마을에서도 귀촌해 트랙터를 구입하는 등 매우 의욕적으로 친환경 농사를 짓던 40대 젊은이가 2년여 만에 친환경 농사를 포기하는 일이 있었다. 생산물의 판로가 제대로 확보되지 못했고, 또 시장에서도 이렇다 할 호응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먹거리에 대장균이 검출됐다거나 이물질이라도 발견되면 온통 난리를 치는 것이 우리 국민들 성정이지만, 이상하게도 시장에서는 친환경 농산물을 찾지 않는다. 친환경 작물은 농약이나 살충제를 치지 않고 생산된 것이니 당연히 겉모양이 매끄럽지 못하다.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 등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살충제를 쳐 벌레를 제거해 말끔하게 자란 것과는 외양상 비교할 수가 없다. 게다가 값까지 비싸니 많은 사람들은 부지불식간 친환경 작물을 외면하게 된다. ‘제초제, 농약 좀 있으면 어떠랴, 깨끗이 씻어서 먹으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을 불현듯 내는 것이다. 이런 마음들이 모여 포부를 갖고 귀촌한 젊은 농부들의 친환경 농사를 포기하게 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초제와 농약이 건강을 해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친환경 농사를 짓고 싶어도 소비자가 찾아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주민 대부분이 노인인 시골에서, 호미 들고 김을 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초제와 농약 사용이 해가 갈수록 더해지는 이유다. 또 지력이 떨어지면서, 퇴비만으로는 영양이 태부족하니, 화학비료의 유혹을 거절하기도 힘들다. 이렇게 생산된 농산물들이 ‘괜찮겠지…’라는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 그들의 몸에 독소를 쌓는다. 이런 패턴의 반복은 결국 질병으로 찾아오고, 건강을 잃는 것으로 이어진다. 조금 비싸더라도, 의식적으로라도 친환경 농산물을 찾을 때, 친환경 농사가 늘어나고 비로소 밥상도 건강해질 수 있다.
대설답게 날씨가 매우 춥다. 언뜻언뜻 눈발이 오락가락 날리고, 장갑을 꼈지만 손가락은 감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아리다. 대설 다음날, 눈 내리고 나니 외려 포근한 느낌마저 든다. 눈 내리니 아무래도 바깥일은 어렵다. 바깥일 대신 거실에 앉아 수확한 서리태 콩 고르기를 해야 한다. 농촌에서는 겨울이 휴식기라고 하지만 이래저래 바쁜 일이 이어진다.
시골살이는 한가할 틈이 없다. 한가할 틈이 없으니 번뇌망상도 줄어든다. 수행자들이 산골을 찾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