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서 살기 어렵다고 난리다. 볼멘소리 오가는 건 산골도 매한가지. 내 사는 마을에도 가짜뉴스가 돌아다닌다. 북에 귤을 보낼 때 돈도 함께 보냈다는 퍼주기 타령에서부터,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살기가 더 궁핍해졌다며 투덜대는 소리 왁자하다. 그러나 민초들이 행복했던 때가 언제 한번이라도 있었나? 고금을 불문하고 민초들은 늘 힘들고 어려웠던 게 사실 아닌가?
빈부격차가 갈수록 벌어져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큰 최악의 나라가 되었는데도 아이러니하게 국민 상당수가 삼성을 걱정한다. 천문학적 재산을 가진 재벌이 세금을 탈루하며, ‘서민의 마지막 보루’ 국민연금에 큰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불법으로 승계 작업을 하다가 들통 나 사달이 난 것을 왜 그들이 우려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경제를 살릴 마땅한 활로가 없는 현실에서 어쩌면 유일한 블루오션이 될 남북관계 개선을 배설하듯 폄훼하거나 반대하는데 여념이 없고, 가진 자들의 횡포가 ‘갑질’을 넘어 ‘계급질’로 달려가는데도 덜(못) 가진 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비난하는데 열을 올린다. 자영업자들의 숙원인 카드수수료 인하를, 카드사들의 반발을 감내하며 단행한 정부를,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앞장서 보도하던 보수언론들이 돌연 카드사의 반발을 대서특필하며 연일 비난하고 적잖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한다.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선동과 가짜뉴스에 부화뇌동 중이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의 성정이 본래부터 이런 정도로 저열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전쟁이나 가뭄, 각종 억압 등으로 어려움이 닥치거나 삶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 지금처럼 불평불만에 가득 차 냉정을 잃은 채 망국적 헛소문에 이리저리 휘둘렸을까?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며, 무기력하게 끌려 다녔을까?
미륵댕이 마을 어귀,
절박한 삶을 미륵불과 함께 희망으로 준비하던 민초들의 신앙이 돌로 서있다.
우리 선조들은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욕설과 비난보다는 미래를 준비하며 희망을 지폈다. 난세 때마다 어김없이 미륵부처님을 찾으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미래를 정성껏 준비하곤 했다. 미륵부처님이 하루빨리 사바세계에 출현하시기를 발원하면서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조성했고, 힘을 모아 마을 어귀에 돌미륵을 세웠다. 그뿐이랴. 후손들만큼은 어려움 없이 미륵부처님이 주재하는 용화세계에서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향나무와 참나무를 땅에 묻는 매향의식을 올리기도 했다. 훗날 미륵부처님이 오실 때 후손들이 부처님 전에 올릴 향(香)을 미리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당진에도 곳곳에 미륵 불상들이 소재해 있다. 정미면의 안국사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미륵삼존불상이 당당하게 서 있다. 또 신평면 운정리에는 마을사람들이 뜻과 힘을 모아 조성한 2미터 남짓 크기의 돌미륵이 마을 어귀에 수호신처럼 자리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조성한 전형적인 마을미륵이다. 민초들의 의지처 역할을 했던 마을미륵은 여느 불상과는 달리 정감이 간다. 부담 없이 다가가 만져볼 수 있고, 안아볼 수도 있는 그런 부처가 마을 미륵이다.
십수 년 전, <돌에 새긴 희망- 미륵을 찾아서>라는 책을 펴냈을 만큼 미륵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에, 잠시 틈을 내어 신평면에 소재한 마을미륵을 찾아 나섰다. 기독교세가 강한 고을 특성상 치성 드리는 이 없는 외로운 부처님일 것이기에, 향하는 발길이 가볍지만은 않다.
굽이굽이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다 보니, 남서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를 바라보며 석양을 마주한 미륵부처님이 시야에 들어온다. 길게 늘어선 갈대들이 바람에 맥없이 흔들리는 스산한 가을 오후여서 그런지 마음도 시나브로 서글퍼진다.
도착하자마자 미륵부처님 앞으로 가서 3배를 올렸다. 예전에는 보호각도 있었고, 공양 올리는 이도 있었지만, 지금 미륵부처님은 비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장승처럼 쓸쓸히 서 계신다. 석불상 주변에는 무덤들이 즐비해 마치 묘지를 지키는 석물로 오인될 정도다.
‘미륵댕이 마을’로 불리는 것은 이곳에 미륵당(彌勒堂)이 있었다는 것인데, 지금은 전각대신에 수명이 다해 쓰러진 고목만이 미륵부처님을 외호하고 있을 뿐이다. 미륵상의 조성연대와 조성자의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이 없었다면, 그리하여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지 못했다면, 이 미륵상은 벌써 자취를 감췄을 지도 모른다.
신평들판을 바라보는 미륵불의 눈길 옆으로 갈대가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추수가 끝난 신평의 광활한 들녘을 바라보고 서 있는 미륵부처님의 눈길이 처연하다. 이 미륵상이 향토유적임을 알리는 표지판에는, 짧은 문구가 적혀있다.
“이 미륵상은 높이 약 220cm, 폭 80cm 정도이고 자연석을 투박하게 다듬어 삼도와 옷 주름살 등을 표현하여 미륵불 모습을 갖추었다.
미륵상의 곁에 있는 명문은 다음과 같다.
앞면 宣德 三年 戊申 二月 日 石□
뒷면 戶長 扈吉…”
옛 신평현성(新平縣城) 관아의 수호신 역할을 했으며, 또한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지는 이 돌미륵상은 돌기둥에 새겨진 명문으로 인해 조선 초 세종 10년(1428년)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또 최근에 돌기둥 뒷면에 매향비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신평의 토성(土姓)으로 호장(戶長)인 호길저(扈吉底)가 주도하여 신평현 내에 사는 불교 향도(香徒)들을 모아서 시주한 후에 1428년에 매향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미륵부처님의 시선을 따라 아스라이 펼쳐진 농지를 바라보았다. 600여 년 동안 지켜보았을 그곳에, 뉘엿뉘엿 지는 해 붉은 기운을 더하고, 기러기 떼 세월을 재촉하듯 날아간다.
죽지 못해 달려온 민초들
끌어안고 사랑 나눠주었던 이여
겨운 이들 마지막 기댈 곳이던 이여
미소도 온기도 다 사라지고
백년지기 나무도 저승으로 보내고
공동묘지 지키는 석물신세가 된 이여
눈물마저 말라붙은 채
세상은 덧없는 거라고 소리치는
더운 피 다시 돌 때까지 껴안고 싶은 이여
-졸시 ‘신평 돌미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