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정윤경
명상이란 무엇인가?
여는 말
명상이란 첨선하는 것과 흡사하다.
목적은 같으나 방편이 다를 뿐이다.
참선이란 화두를 들고 나를 알아내는 것이다.
반면에 명상은 자기를 오롯이 지켜보는 것이다.
참선과 명상의 길은 다르지만
결국 ‘나는 누구인가?’를 자각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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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깨어 있는 존재의 꽃이다.
명상은 어떤 종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명상을 통해 자신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자연의 섭리 같지만
홀로 겪는 명상의 세계가 있어 생명의 신비인 꽃을 피운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조용히 안팎으로 지켜보라.
지켜보는 이 일이 곧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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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조용히 앉아
끝없이 움직이는 생각을 지켜보라.
그 생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라.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이고 망상이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
그런 사람은 언덕 위에서 골짝을 내려다보듯 거기서 초월해 있다.
이러니저러니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강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지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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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누가 깨닫는다고 했는가?
깨닫겠다고 하는 사람이 문제다.
깨달으려고 해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깨달음은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것이고 꽃향기처럼 풍겨오는 것.
그러니 깨닫기 위해서 정진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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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묵묵히 쓸고 닦는 일이, 시장에서 무심히 사고파는 그 행위가,
맑은 정신으로 차분하게 차를 모는 그 운전이 바로 명상이다.
무슨 일에 종사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일을 낱낱이 지켜보고
자신의 역할을 지각하는 것이 명상이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이런 명상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바깥 소용돌이에 자칫 휘말리게 마련이다.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일이 없으면
우리 미음은 날이 갈수록 사막이 되고 황무지가 되어간다.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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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불행을 피하려고 말라.
그런 자기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니.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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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우리는 이것을 일과 삼아서 해야 한다.
모든 것이 최초의 한 생각에 싹튼다.
최초의 한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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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려면 맑고 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명상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훈련이다.
명상은 절에서, 선방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 겹겹으로 둘러싸인,
겹겹으로 얽혀 있는 내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서
무심히 주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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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으려면 최소한의 인내력이 필요하다.
홀로 있으면 외롭다고 해서 뭔가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자기 영혼의 투명성이 고이려다가 사라진다.
홀로 있지 못하면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는다.
홀로 조용히 사유하는, 마음을 텅 비우고 무심히 지켜보는
그런 시간이 없다면 전체적인 삶의 리듬이 사라진다.
삶의 탄력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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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론 순간순간 죽어간다는 소식이다.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녹스는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사람은 단순하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맺는 말
참선은 화두 들고 나를 찾아가는 수행이다.
그러므로 화두라는 이정표를 놓쳐서는 안 된다.
반면에 명상은 순간순간 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참선과 달리 내 자신이 이정표가 되는 셈이다.
수불선사는 화두 드는 요령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머리로 들지 말고 가슴으로 들어라.
머리로 들지 말라는 말씀은 화두를 들되
알음알이 사량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