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날 이른 아침부터 서리대신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여름 가뭄에 이어 가을에도 가뭄에 애를 태워야하나 근심하던 차에 내리는 비라서 퍽이나 반갑다. 그러나 가까스로 내리던 비는 동쪽에서 해 뜨자 그쳤고, 이내 청아한 가을 햇살이 마당을 말렸다. 일기예보에서 강우량이 미미할 것이라고 했기에, 비가 다 그쳤다보다 생각하고 비닐하우스 안에서 말리던 끝물고추를 마당에 펼쳐놓고, 일주일 전 베어 마당으로 옮겨놓은 들깨 단을 덮었던 천막도 거뒀다. 게다가 유난히 청량한 햇볕이 아까워 이불까지 들고 나와 빨랫줄에 널었다.
어제는, 들깨를 베어낸 후 비어있는 밭이랑에 마늘을 심기 위해 온종일 천연액비와 퇴비를 뿌리고 흠뻑 농업용수를 주었다. 고된 노동을 한 터라 오늘은 마침 비가 내린다고 해서 모처럼 휴식을 갖고자 했으나, 오는 둥 마는 둥하던 비가 그치니, 다시 일거리가 손님처럼 찾아왔다.
이리저리 두어 시간을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방으로 들어와 자투리 시간 동안 집필을 시작하려는데, 돌연 번갯불이 번쩍거리고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한 걸음에 밖으로 뛰어나가 하늘을 보니 그 곱던 햇살은 간 데 없고 먹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덮었다. 부랴부랴 이불을 걷어 거실에 던져 놓고, 다시 뛰어나가 고추를 비닐하우스 안으로 허겁지겁 옮겼다. 그 사이에 하늘에서는 후드득 소낙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리던 들깨와 들깨 단은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췄다. 들깨야 볕 좋은날 다시 말리면 되겠지만 공연히 헛수고를 했다는 허탈함은 어쩔 수가 없다.
霜降에 내린다는 서리가 한낮의 소나기로 현묘재의 가을을 후리고 간다.
난 데 없이 퍼붓는 가을비에 온 들판을 수선스럽게 만들던 벼 익는 소리는 묻혔고, 벼 베는 콤바인 소리도 멈췄다. 동물들도 놀랬는지 구구 대는 산비둘기의 울음도, 밤낮 없이 왝왝거리는 고라니의 괴성도 일제히 잠잠해졌다.
마늘 심을 이랑에 뿌려 놓은 액비와 퇴비가 땅 속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비를 흠뻑 맞는 것이 좋으니, 상강에 내리는 가을비가 야속하지만은 않다. 더구나 가을 가뭄이 이어져 배추농사를 망칠까 염려하던 터였기에 되레 굵은 빗줄기가 고맙기만 하다.
마치 여름날 장대비처럼 번갯불에 천둥이 진동하고 거센 빗줄기가 퍼붓는다. 거실에 앉아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타다다닥~ 소리가 들려 현관문을 제치고 뛰어 나가보니 웬걸,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고 있다. 작은 구슬만한 얼음덩이가 삽시간에 누리를 삼킬 듯 기세등등해 한창 자라고 있는 배추농사가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다행히 우박은 잠깐 동안만 떨어진 후 멈췄다.
그러나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는 바람을 타고 창문 유리를 세 시간 가까이 힘차게 두드리고 있고, 집 뒤편 아랫집 할머니네 소유의 감나무 이파리들은 추풍낙엽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고 보니 뒷산 산마루에서 시작한 단풍이 시나브로 우리 집 화단까지 번졌다. 배롱나무는 이파리 8할이 떨어져 벌써 앙상하고, 매화나무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힘을 잃고 있다. 화단에 심어 놓은 구지뽕나무 이파리는 노랗게 단풍이 들어 하나 둘 바람에 날리고 있다. 오직 한 그루 다경향실 온실에 옮겨 심은 인도 보리수만이 푸르른 잎을 자랑하고 있다.
거세게 내리던 빗줄기가 잦아들더니 오후 3시쯤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햇살이 구름 사이를 뚫고 쨍하니 내리쬐고 있다. 가을 햇살은 유난히 눈이 부시다. 아무래도 청명한 하늘이 햇살을 더 윤기 나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래서 여름에도 쓰지 않았던 선글라스를 끼고 밭을 둘러보러 나갔다. 배추가 우박으로 인해 상하지는 않았는지, 마늘을 심기 위해 만들어놓은 두둑은 온전한지, 뿌려놓은 퇴비와 액비는 땅속에 잘 스몄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다행히 배추 피해는 거의 없다. 그런데 거센 빗줄기를 서너 시간이나 흡수했는데도 정성껏 마련해 놓은 마늘밭 이랑에서는 여전히 퇴비 냄새가 진동한다. 이 냄새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비닐을 덮으면 가스로 인해 작물에 피해가 갈 수도 있어, 한 차례 정도는 더 비를 맞춰야 한다. 마침 2~3일 후에 비가 예고되어 있어 다행이다. 일기예보라는 것이 100%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높은 적중률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예상보다 강우량이 많거나 바람이 거센 경우가 더러 있지만, ‘지형적인 영향으로 ~’라는 기상 캐스터의 전제어는 오보의 책임을 벗어나게 해주는 전가의 보도와 같은 것이니, 굳이 시비를 따질 일은 아니다.
아무려나, 상강에 내린 장대비로 뒷산의 나무들은 더 성기고 헐거워졌다. 아직 서산에 해가 걸렸는데도 동쪽 하늘에 둥근 가을달(秋月)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달을 보니 20여 일 전 퇴계 종택에서 만난 ‘秋月寒水亭(추월한수정)’이라는 멋진 현판이 떠오른다. 추월한수정은 퇴계의 후학들이 선생의 도학을 기려 세운 정자에 붙인 이름이다. 주자(朱子)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삼가 천년의 마음을 살펴보니
가을 달이 찬 강물을 비추는 듯하네.
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
스승을 기리는 정자의 이름을 ‘추월한수정’이라 한 것은 후학들이 퇴계를 대하는 마음이 주자가 공자를 대하는 것과 같음을, 즉 공자와 퇴계를 같은 반열로 숭모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추월한수’란 모름지기 성인의 마음은 가을 달처럼 티끌 한 점 없이 밝고, 차가운 강물처럼 투철하고 명징(明澄)하다는 의미다
우박 섞인 장대비가 내리고 갠 상강 날, 그만 혼비백산 부산을 떨고만 이 산골 서생의 성정은 언제쯤이나 밝고 명징해질 수 있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