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품은 서산 부석사 (2)
아미타부처님이 설법을 펴시는 안양루
전통사찰을 방문했을 때 ‘내가 이 절에 도착했구나’하는 성취감을 갖게 하는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일주문이고 다른 한 곳은 《○○루》라는 누각의 아래층에서 고개를 들어 금당이 보이는 곳입니다. 누각을 통과해야 금당을 들어설 수 있음을 생각하면 누각은 부처님을 뵙기 위한 또 하나의 문입니다.
이보다 더 검소함이 없음을 보여주는 안양루
모든 사찰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찰이 - 금당이 있는 마당보다 한 단 정도 낮게 대지를 조성하여 - 일주문과 금당을 잇는 직선상에 2층의 《○○루》를 짓고, 아래층을 통과하여 금당에 이르도록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석사는 금당 정면에 안양루를 두면서도 안양루 아래층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금종각을 돌아 금당에 이르도록 길을 냈습니다. 안양루가 1층으로 지어진 건물인 때문입니다.
안양루에 모신 여러 부처님
《안양루》는 자연석을 두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홑처마로 지은 맞배지붕집입니다. 극락전을 마주보는 동향집으로 동쪽은 기둥만 세워 시원스럽게 터놓았고, 나머지 세 방향은 벽을 둘러막았는데, 서쪽 벽만 각 칸마다 판문을 짜서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다섯 개의 창에서도 넓은 간척지에 가득히 익은 벼가 보이는데, 봄부터 땀 흘린 농부는 물론 보는 이들의 마음도 풍요해지는 풍경입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주춧돌로 놓으면서 그랭이질을 하여 기둥을 세웠는데, 정면 기둥만 곧게 뻗은 나무를 사용하였을 뿐, 후면에 세운 기둥과 대들보는 도량주를 사용하였습니다. 때문에 벽면에 기둥과 대들보를 따라 그려진 구불구불한 선을 보면서 팽팽하게 긴장하고 지내던 마음이 확 풀려버렸는데,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이런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훤히 트인 마루 북쪽에 불단을 만들어 미륵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열반상을 모셨는데, 안양루에서는 언제나 중생들을 위한야단법석이 벌어지는 셈이 됩니다.
경허선사는 무슨 일로 칼을 찾으셨는가?
사찰이 갖추어야 할 건물로 승방을 빼놓을 수 없는데, 요사채는 스님의 수행과 참선 그리고 의식주를 위하여 아무리 작은 사찰이라도 꼭 있어야 할 건물입니다.
부석사에 요사채로 사용되는 건물의 이름은 〈찾을 심〉, 〈칼 검〉, 〈집 당〉자를 쓰는 《심검당(尋劍堂)》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어둠을 끊어낼 수 있는 칼을 찾는 곳이 되겠습니다. 사찰 금당 벽화 중 많이 볼 수 있는 그림은 《십우도》라 불리는 심우도인데, 잃어버린 소를 찾아 헤매는 것이나 무명을 베어낼 칼을 찾는 것은 불자들이 꼭 이루어 내고자하는 서원입니다.
연등이 걸려있는 극락전과 누워있는 소처럼 구부러진 심검당 . 마당에 빨간 지붕이 있는 곳은 우유약수터
요사채의 이름을 심검당이라 하였으나, 이 건물에는 심검당 외에 목룡장(牧龍莊)과 부석사 현판도 걸려 있습니다. 어둠을 끊어내겠다는 심검당과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심지를 담은 목룡장 현판은 경허선사께서, 부석사 현판은 경허선사의 제자인 만공선사께서 쓰셨습니다. 건물 한 채에 심검당과 목룡장이라는 현판 두 개가 걸린 것은 경허선사께서 각각의 방을 선방(禪房)과 강원(講院)으로 사용해, 꺼져가는 선불교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큰 스님 두 분께서 현판을 걸기 전에는 무슨 이름으로 불리었을까요? 옛사람들이 기울어져가는 한 칸짜리 집과 간신히 드나드는 작은 문에도 이름을 지어 현판을 걸어놓고 풍류를 즐겼던 것을 생각하면, 이전에는 이곳의 이름이 무엇이었거나 어떻게 불려 졌었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심검당은 서향으로 지어진, 정면이 열 칸이나 되는 그리고 특이하게도 구부러진 생김을 가진 팔작지붕집입니다. 주춧돌은 안양루와 마찬가지로 자연석을 놓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심검당 정면에 세워진 기둥이 제각각으로 둥근기둥, 8모 기둥, 도량주, 그리고 인방을 걸기 위해 홈을 파낸 재활용한 기둥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건물이 한 번에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여러 차례 중건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구부러진 생김의 집은 처음부터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서향이지만 약간 틀어진 방향으로 지어진 두 채의 건물을 연결시키면서 구부러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 채는 초익공 형식에 툇마루를 갖고 목룡장 현판이 있는 종무소 건물이고, 다른 한 채는 삼익공 주심포로 지어졌고 쪽마루를 가진 심검당 건물입니다. 두 채의 건물이 두 칸 집을 매개로 이어졌는데, 두 칸 집에서 꺾어진데다 창방도 없고 익공도 짜지 않은 것 등은 집을 연결시키면서 양쪽의 지붕 높이를 맞추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생각입니다.
길게 구부러져 열 칸이나 되는 신검당은 한가롭게 누워서 되새김질하는 소 몸통을 닮았습니다. 머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부석사 주불을 모신 극락전이 자리 잡았고, 극락전 옆에는 영락없이 소뿔 형상의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가슴쯤 된다 싶은 곳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우유약수라는 이름으로 중생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주는 천지조화
목룡장과 심검당을 연결해 누워있는 소를 형상화시킨 부석사는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 극락전을, 응당히 소뿔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모양의 바위가 세워져있습니다. 천지조화로 그 자리에 바위가 서있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곳에 세워놓을 소뿔 모양의 바위를 찾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온순한 동물의 대명사인 소에게는 뿔이 자기 보호를 위한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렇지만 뿔이 치받을 것처럼 위로 솟아났거나 앞쪽으로 굽은 생김이라면 씨름소가 아니더라도 다른 동물과 사람에게도 위협적입니다. 온순한 누렁소를 연상시키는 뿔 모양의 큰 바위에 “부석사”를 깊게 새겨놓은 표석을 돌아가면 마애아미타불상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48대원을 다 이루시고 서쪽을 바라보고 계신 마애아미타부처님
아미타부처님은 수직의 암벽에 연화대좌에 서계신 모습으로 두터운 양각의 부조로 새겨졌습니다. 서쪽을 바라보는 위치에 아미타부처님을 조성하기에 알맞은 암벽이 솟아져있으니, 천지만물도 있어야할 곳에 생겨나는 것인가 봅니다. 마애아미타부처님은 시절인연에 따라 조성됐는데, 발단은 6년 전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서 발생한 《금동관음보살좌상》절도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부석사 신도는 물론 많은 불자들과 학계 나아가 우리나라와 일본 국민들을 태풍의 눈으로 빨아들였고, 국민감정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단순한 절도사건임에도 이 사건은 한일 정부와 양국의 사법체계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트렸고, 졸지에 장물이 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어느 나라 불자들에게 언제나 경배를 받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조선시대에 왜구에게 약탈되고 도난당한 불미스런 일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한 주지스님은 영원토록 부석사를 떠나시지 않는 마애아미타부처님을 모셔야겠다는 소원을 갖게 되었고, 이 소원이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져 많은 불자들이 이곳에서 아미타부처님을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영원히 부석사를 떠나지 않으실 아미타부처님
부처님은 세 길 정도의 키 높이에 비해 넓은 어깨를 가지셨는데, 억겁의 많은 중생을 품어줄 수 있는 견실한 몸과 마음을 표현한 듯합니다. 화염문이 없는 둥근 두광에 새겨진 정사각형에 가까운 얼굴과 없는 듯 낮은 육계, 이마 중간에 솟은 백호, 초승달 같은 눈썹과 긴 눈, 느리게 쳐져 어깨에 닿는 귓바퀴 등의 부처님 상호도 새겨졌습니다.
어깨까지 올려 세운 오른팔은 엄지와 장지를 맞대어 손바닥이 앞으로 향하였고, 왼팔은 가슴 아래까지 직각으로 올렸는데 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중생들이 쌓은 공덕을 아홉 개의 품으로 나누고 그에 맞는 수인을 취하시는데, 이 수인은 어떤 중생을 맞아들이기 위한 수인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깨를 덮고 내려온 부처님의 통견가사와 승기지는 부드럽게 주름져 흘러내렸고, 치마처럼 내려온 군의 밑으로 나온 두툼한 발등은 복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억겁 중생을 극락정토에 이끌어주는 명당터
마애아미타불상을 보고 암벽이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아미타부처님 좌우에 협시하시는 보살상도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남는 안타까움은 도비산의 산세를 흩트리지 않고 가꾸어 온 부석사의 편안함이 덜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부석사 여러 전각의 기단과 주춧돌은 자연석을 연마하지 않고 사용하였고, 일주문을 들어서 설법전을 바라보며 오르는 길은 물론 마애아미타불상으로 오르는 길, 이곳저곳을 오르는 계단 등도 인위적인 것을 최소화해 자연과 어울리는 정경 모두가 보는 눈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에 반해 마애아미타불상은 부조를 한 후 돌 갈기에 너무나 정성을 기울인 탓에 기계적인 흔적이 짙어져 자연스러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비바람과 마주하고, 때가 묻고, 이끼가 끼면서 이 또한 자연과 닮아갈 것입니다.
의상대사가 구법 유학을 위해 당나라를 다녀 온 뒤, 자신이 무사히 신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선묘낭자의 고귀한 넋을 천도하기 위해 찾아낸 명당에 지은 절이 부석사입니다. 그런 명당에 마애아미타부처님이 계시니 이곳에서 일념으로 아미타부처님을 칭송하는 불자들이야말로 큰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