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테라와다 불교, 특히 마하시 사야도의 닙바나 해설과 도과 성취의 안내
3. 수행의 도정
가. 이러한 방법으로...
나. 경이로움
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라. Sampajañña(분명한 앎)의 가르침
바. 모두가 같은 도정(道程)인가?
사. 바라밀 공덕
아. 이곳에 오면 누구나 성자가 된다.
자. “귀의”라는 시(詩) 한 수(首)
젊은이들이여! 이 글을 읽으시는 눈 밝은 이들이여! 명상수행을 익혀 여생과 다음 생까지를 대자유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십니까? 열반락(涅槃樂)을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마음을 내십시오.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 글은 단순한 마하시 사야도의 기법을 중심으로 써 갔습니다만, 사실 명상의 테크닉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각자의 성향대로 계발하여 수행하면 됩니다.
고 빤띠따라마 사야도의 말씀대로 열댓 가지 각자의 수행법을 침대 아래 내려놓고 오직 이곳 마하시 사야도가 강조하는 테크닉을 중심으로 설명했을 뿐입니다. 스스로 계발하여 자기의 성향, 자기의 생활에 맞는 수행을 반드시 올바른 교설에 따라 수행하십시오. 그에 앞서 붓다에 귀의해야 합니다. 귀의의 참 목적을 갈파한 시 한 수 드리오니 마음을 내십시오.
귀의
이익을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지식을 구함도 아닙니다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당신이 태양의 아들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한량없는 힘에 이끌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지혜와 자비의 힘에 이끌려
쓰라린 윤회의 바다를
안전하게 벗어나고자 함입니다
오, 석존이시여
이렇게 머리 숙여
당신께 귀의하나이다
인도의 근대시인 라마 찬드라 브라하티(Sri Rama Chandra Bharati)의 시입니다. 이 시의 명제, 제목인 귀의는 빨리어로 “Saranaňg”입니다. 우린 귀의라 하고 의지처라 번역 사용하는데, 이 뜻은 단순히 의지한다거나 몸을 의탁한다거나, 경제적 도움을 받기 위한 의지처에 의지한다는 뜻이 아니고, 난파선에서 격랑에 떨어져 절체절명의 순간 구명조끼나 널빤지나 구조선과 같은 생명구조와 같은 의지처이고, 무인도를 만난 피난처라는 뜻의 Saranaňg을 귀의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라도 이러한 난파선에 비유할 만한 일들을 몇 번쯤 체험하게 됩니다.
귀의하십시오! 그리고 수행하십시오! 이 길만이 선택이 아닌 절체절명-쓰라린 윤회의 바다를 안전하게 벗어나는 절대의 길입니다. “귀의와 수행” 바로 성자의 법에 따라 성자가 되는 길입니다. 고따마 싯다르타 왕자의 출가 목적이 사문유관을 하시고서 사람에게는 지위고하나, 재력, 명예 등에 관계없이 찾아드는 괴로움과 나고, 죽고, 또 나야 하는 고통스런 윤회를 보시고서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라는 대의단과 그걸 부수고자 하는 용기를 가지고 그 길을 찾고자 출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으셨습니다. 찾아내신 것입니다. 4성제니 8정도니 12연기법 등은 깨달음 이후에 정립된 것, 장황하게 깨달음을 장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의 복잡 난해한 교설들을 한 말로 풀이하면 “괴로움을 여의고 윤회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조금 더 줄인다면 “몸과 마음의 문제 해결”입니다. 완전하게 해결하는 닙바나를 교설하신 것입니다. 그걸 8만4천 법문으로, 37조도품으로, 8정도로, 3학으로 Sati의 수행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점차를 통하여 성인의 입류부터 아라한의 도과에까지 이르러 드디어 괴로움과 윤회를 완전히 벗어나는 닙바나라는 궁극까지 자세히 안내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곳에 미얀마 수행처에 오시면 그 길이 보입니다. 성자를 닮아가다 드디어 성자가 되는...
사람들은 성속(聖俗)간에 나름대로, 혹은 각자의 종교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앞 장에서도 얘기했듯 어느 누구라도 행복의 충족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의 견해입니다. 즐거움과 행복, 감각적 쾌락의 충족 정도에 따라 행복의 척도 속에서 행복의 정도 또한 달라집니다. 이와 같은 행복을 뛰어넘은 지고하고 완전한 행복을 붓다는 2,600년 전에 설파하시고, 그 길을 제시하였으나, 헤일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 극소수만이 그 길을 찾아갔을 뿐입니다. 그 극소수에 끼임은 그 사람들의 성향(업)이며 정진일 뿐, 그 반열에 들 수 있는 길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그 어려운 수행을!”이란 생각은 이제 지우십시오. 그 시작도 가슴 뿌듯한 일이고, 중간은 더욱 즐겁고 행복한 일이고, 그 끝은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얼마나 가슴 떨리는 열락이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것 모두는 닙바나를 찾아가는 이러한 구도의 여정이 훨씬 즐겁고 행복한 일이며 보람찬 일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때론 도과 성취 후에 세상은 어떻게 다가오고 펼쳐질 것인가의 달콤한 망상을 해보기도 합니다만, 세상은 그대로일 뿐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의 변화일 뿐이라 지레 짐작할 뿐 “지금 여기”가 항상 평온하고 행복감이 충만하다는 이 조그마한 과정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차. 또 다른 바람과 당부의 말씀
이번 수행 기간이 끝날 무렵 또 다른 한 가지의 바람을 새깁니다. 어쩌면 서원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이곳 마하시 수행처에서 각 나라 yogi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수행자이고, 그 점이 어떨 때는 면구스런 일이라고 앞부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번엔 달라졌습니다.
80이 훨씬 넘어서도 건강한 수행자로 매년 모습을 보이는 사표(師表)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나이 많음이 절대로 자랑일 수 없는 세상인심이지만, 법 안에서는 다릅니다. 지혜의 숙성과 더불어 청정한 삶은 본보기의 자랑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모습을 보는 이는 4악도를 벗어나고...”의 장엄염불의 내용에 접근할 수 없을지라도...
더불어 귀국 후 생활의 정화를 다짐합니다.
한국에서의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노년의 일과를 배운 대로 Sampajañña 수행의 연속이기를...
스스로 많은 문제를 제기하여 번뇌망상이 주인 되어 휘두르는 예전의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 수행처에서는 각 나라 yogi들과 수행정진을 돋보이려는 경쟁심도 있고, 따라서 국격(國格)까지 고려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나아가, 성자를 닮아가고 성자가 되려는 노력의 경쟁을 한국에서도 지속되었으면 하여, 더욱 명상 시간을 늘리고 명상의 생활화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일도 아닌 일에 바빠서 진정한 일을 놓치고 일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윤회의 연속일 뿐, 수행자의 진정한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바라밀이 되는 일을 해야, 진정한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닙바나의 실현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도 뒤따릅니다. 월남전 참전 후유증으로 수많은 질병과 투병하며, 1년이면 40여 차례 병원의 신세를 졌지만 이곳 미얀마에서의 수행력 증진에 따라 이제는 병원을 찾는 횟수도 차츰 줄어들고 그간 한 번도 입원해 본 경험이 없음에 스스로도 놀라며 “법의 위력”과 “수행의 공덕”을 많이 찬탄하고 있지만, 역시 체력의 조절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수행에서 익힌 대로, 병마의 장애에 끄달림 없이 자연의 성품, 법의 성품으로 알아차리며, 그 때 걱정하기로 했습니다.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지금 앞당겨 걱정함도 어리석음이니까요. 아무튼 나에게 찾아드는 모든 것은 Sati의 대상이며, 더욱이 병마는 이제 저에게 아주 친한 친구가 되어, 나의 막행막식(莫行莫食)의 폐해를 줄이는 감시자요, 길잡이도 되고 있어, 자정과 조절의 능력까지 키워 줍니다.
감각적 쾌락의 늪에서 차츰 빠져 나옴을 알게 합니다. ‘젊었을 적에 수행하라’는 선현들의 충언을 귓등으로 들어온 과보를 충분히 받았고, 그걸 안 지금에야 수행에 전념하다 보니 뒤따르는 장애가 많음을 술회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만고환란과 만병을 이겨내는 수행을 하십시오. 위빠사나 수행은 생활선(生活禪)입니다. 꼭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는 좌선 수행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Sati의 수행을 지속할 수 있는 생활선입니다. 고무적이게도 지금 대기업에서는 명상으로 일과가 시작되는 곳이 늘어가는 추세랍니다. “나이 들면 해보지” 하는 안이하고 게으른 생각을 버리십시오. 수행은 늙고 나이 들어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젊음을 살아보니 인생 100년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갑니다. 세간에선 이를 초로인생이니 유수세월이라 하지요. 경전에서의 비유는 창구멍을 통해 본 백마 탄 이의 휙 지남과 같고 금시조의 비유도 들었습니다.
그걸 붓다의 세계관을 들어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 세계관은 물리적이고 현상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화적이거나, 비합리성으로 증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31천의 세계는 수행자의 정신세계인 명상수행의 차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합리적이게 펼쳐 보이십니다. 그 중에서 욕계의 11천 가운데 천상의 수명이 가장 짧은 여섯 번째 하늘 체계인 사대왕천 수명이 500천상 년으로 인간의 수명으로는 960만년이 됩니다. 그 다음 하늘세계는 그의 갑절, 그 다음은 또 갑절이다가, 색계의 12천부터 27천과 무색계의 4처천까지는 겁의 세월, 끝인 비상비비상천은 8만4천대겁의 수명으로 끝납니다. 그 중 하늘 세계의 시작이고 가장 짧은 수명을 누리는 4대왕천의 960만년과 인간수명 100년을 비교해 봅시다. 얼마만큼 크기의 비교인지를 알 수 있듯, 100년의 시간은 그곳 하늘 사람들(天人) 팔꿈치를 한번 구부렸다 펴는 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 경험 속에서 이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년, 30년,...을 돌아보면, 이 시간들이 그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이 들면 해 보겠다, 다음 기회에 수행을 해보자는 것은 얼마나 안이하고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붓다의 유훈인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뜻을 새삼 가슴 깊이 새기게 될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먹고, 배설하고, 번식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무슨 뜻을 세워 매진하고, 드높은 성공을 위해라는 등의 자세는 세속 한생의 보람은 될지언정, 헤아릴 수 없는 윤회를 기억 못한 소치로 빚어지는 한낱 봄날의 꿈같은 얘기일 뿐입니다.
지상의 목표인 윤회를 벗어나는 길, 도과의 성취로 궁극의 닙빠나를 실현하는 일에 비하면 견줄 수조차 없는 작은 일에 우리는 너무 묶여 있습니다.
장자(莊子)의 말처럼 우리 범부들은 엊저녁 꾼 소몽(小夢)에 매달려 한 생이라는 대몽(大夢)을 잊고 사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일갈을 떠올리게 됩니다. 거듭 법은 만나고 알았을 때가 가장 빠른 시점입니다. 얽히고설킨 인연사를 서서히 옅게 만들고 “필요한가? 적합한가?”를 항상 살펴, 정리해 가며 수행해감을 “출리(出離)”라 합니다. 꼭 머리 깎고 가사 입고 비쿠나 비쿠니계를 수지하는 것만이 출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얽힌 인연사를 막무가내 “나 몰라”라고 팽개치고 출리랍시고 용단을 내리는 것은 자칫 비겁한 도망자일 수밖에 없는 세간의 평가보다는 그 용단이 훨씬 값지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