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21회>
팔상도1
여름철 과일들이 개다리소반에 놓여 있었다. 왕실에서 가져온 포도, 참외, 수박 등의 과일이었다. 그런데 세자 일행은 개다리소반에 놓인 과일을 먹는 시늉만 했다. 함허와 신미도 포도송이에서 포도알 한두 개만 먹었을 뿐 수박은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 세자와 왕자 등은 궁금한 것이 많은지 함허에게 이것저것 끊임없이 질문했다. 특히 나이보다 조숙한 10살의 수양이 진지했다.
“대사님, 부처님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천축에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천축은 여기서 얼마나 멉니까?”
“명나라를 거쳐 걸어가는데 수년이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바다로 가는 바닷길도 있습니까?”
“명나라 광주로 갔다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가는 바닷길이 있습니다.”
왕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9살의 안평은 가끔 곧 뒤로 넘어질 듯 자세가 흐트러졌다. 상궁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안평의 자세를 바로잡아주곤 했다. 나중에는 세자까지 방안의 분위기가 따분한지 함허에게 한 마디 했다.
“대사님, 법당 벽에 그려진 그림은 무엇입니까?”
“팔상도라는 벽화입니다.”
“누가 그렸습니까?”
“승려들이 그린 것입니다.”
이번에는 정의공주가 말했다.
“대사님, 팔상도란 무엇을 그린 그림입니까?”
“팔상도란 부처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린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보다는 밖에 비가 오고 있지만 직접 보시면서 얘기를 들으시면 좋을 것입니다.”
은근히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던 세자가 손뼉을 쳤다.
“처마 밑에 서면 비를 맞지 않을 것이니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어서 빨리 밖으로 나가시지요.”
수양도 거들었다.
“밖에서는 오늘 우리 형제들에게 삼배를 받은 신미대사님의 말씀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신미가 사양했다.
“소승의 스승 법문을 들으소서.”
“아니다. 왕자님이 너를 지목한 뜻이 있을 것이니라.”
수양이 또 말했다.
“오늘 대사님은 우리 형님과 누님, 저와 동생의 스승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형제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말씀하셔야 합니다.”
“말씀드려라. 더 없이 좋은 기회다.”
함허가 수양의 말에 맞장구치듯 신미에게 말했다.
“세자 저하께서 궁금해 하신 팔상도를 말씀드리되 비가 오니 법당을 벗어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신미는 더 사양하지 못했다. 그때 정의공주도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말했다.
“저도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소승이 아는 대로 소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일생을 왜 벽화로 그린 것입니까?”
정의공주도 왕자들 못지않게 물었다. 조심스럽게 질문할 때마다 두 눈이 반짝였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통도사 팔상도 중 도솔래의상
“한자로 된 <팔상록(八相錄)>이 있습니다만 무지렁이 신도들이 읽지 못하므로 그림으로 알기 쉽게 그린 것입니다.”
수양이 또 말했다.
“그렇다면 배우기 쉬운 우리만의 조선 글을 만들어 <팔상록>을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외우기 쉬운 조선 글을 만들면 <팔상록> 뿐만 아니라 한자로 된 어려운 불경들을 백성들이 누구나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미는 내심 놀랐다. 나이 어린 수양이 자신의 관심사를 정확하게 꿰뚫어 말했기 때문이었다. 수양은 대담한 근기와 핵심을 짚어내는 총명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신미는 나이 어린 도반을 만난 듯 흡족했다. 조선 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양과 의기투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는 아침나절보다는 기세가 잦아들어 있었다. 그래도 가는 비가 오락가락 했다. 그러고 보니 비는 신미가 세자와 수양, 안평, 정의공주를 만나게 해준 매개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함허가 주재한 야단법석은 이틀 전에 끝났지만 비가 오는 바람에 세자 일행은 발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여름감기를 걱정하는 소헌왕후가 내시와 상궁을 시켜 세자 일행의 입궐을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함허는 이와 같은 상황을 놓치지 않고 신미를 급히 불렀던 것이다.
서당(西堂)을 지키는 병사 무리가 이번에는 법당을 에워쌌다. 일반 신도들이 법당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함허는 법당까지만 세자 일행을 안내한 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대신 대자암 주지 명호가 신미 옆을 지켰다. 신미는 세자 일행에게 팔상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벽화를 보십시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 도솔천에 계신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벽화를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이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도솔천에 계신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살펴보시는 모습입니다. 도솔천은 부처님이 될 보살들만 사는 것이 아니라 천인들도 살고 있는 곳입니다. 부처님도 도솔천에서는 호명보살이라고 불렸습니다. 하루는 천인들이 호명보살에게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해달고 청합니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당신이 10바라밀을 행하심은
제석천이나 마왕, 범천, 전륜왕의 영광을 위해 이룬 것이 아니옵고,
오직 저 세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일체지(一切智)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신 것이옵니다.
스승이시여,
바야흐로 부처님이 되기 위한 때가 왔나이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부처님이 될 때나이다.
호명보살은 자신의 마음과 천인들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자신은 이때를 위해 10바라밀을 닦아 왔던 것입니다.”
수양이 벽화를 뚫어지게 보더니 말했다.
“바라밀이란 무엇입니까?”
“생사고해를 건너 열반에 이르는 방편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생사란 지금 숨 쉬는 순간부터 인생이 끝나는 죽음까지를 말합니다. 이를 일기생사(一期生死)라 합니다. 또한, 숨 쉬는 호흡지간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한 생각 일어나서 한 생각이 스러지는 찰나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를 찰나생사(刹那生死)라 합니다. 번뇌 망상을 일으켜서 그 번뇌 망상이 또 다른 번뇌 망상을 낳아 반복해서 이어진다면 이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입니다. 저승에 가 있고, 지옥에 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번뇌 망상이 끊어져 맑게 깨어 있다면, 이는 마음이 평안하여 극락에 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윤회란 어느 한 생이 죽어 다른 생으로 가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번뇌 망상이 순간순간 이어지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하다고 깊이 깨달을 때 번뇌 망상이 사라지니 이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걸림이 없어지는 경지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보듯 ‘관자재보살이 바라밀을 행할 때 오온이 공함을 알고’와 같은 경지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왕자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10바라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살이 되고자 닦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이 6바라밀이고, 나머지 4바라밀은 6바라밀을 닦은 보살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닦는 바라밀입니다. 방편바라밀, 원(願)바라밀, 삿된 것을 깨트리는 역(力)바라밀, 일체법을 알아버리는 지(智)바라밀 등입니다.”
신미의 말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수양은 물론이고 세자와 안평, 정의공주는 단번에 신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신미가 얘기를 하는 동안 꼼짝 않고 귀를 기울였다. 신미 역시 그러한 세자 일행에게 감동하여 정성을 다해 말했다.
“천인들의 청을 받은 호명보살은 태어날 시기와 장소, 신분을 생각합니다. 시기를 생각한 까닭은 세상이 너무 안락할 때는 신앙심이 생겨나지 않고, 세상이 너무 타락해 있으면 신앙심이 메말라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소는 상업이 발달한 도시보다는 순박한 사람들이 농사짓는 천축의 카필라성을 택합니다. 신분은 단순하여 믿음이 강한 무사귀족계급을 택합니다. 모든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은 믿음에 대한 아집과 편견이 심한 계급이었기 때문에 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보살이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여러 천인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했습니다. 심지어 보살은 어느 왕비의 몸을 빌려 태어날 것인지도 천인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결국 지혜가 뛰어나고 자비로운 카필라성의 마야왕비를 택했습니다. 보살은 마야왕비의 태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설법했습니다. 미륵보살에게 말세가 되면 지상으로 내려와 보살 자신이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제도하라고 당부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탄생은 천인들의 간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부처님 자신의 원력으로 태어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중생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 중생은 자신의 원력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기도로 태어나기는 하지만 해탈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원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수양은 부처님이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 살았고, 무슨 바라밀을 닦았고, 어느 시기, 어떤 장소와 신분으로 태어나려 했는지를 알고는 몹시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은 이미 잘 익은 자두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바라밀을 닦아 보살이 되면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태어나게 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