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11회>
강무(講武)
1423년 이른 봄.
북한강에 발을 담그는 운길산 산자락에 용이 그려진 붉고 노란 기들이 펄럭였다. 깃대는 한 군데만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영역을 표시하듯 듬성듬성 세워져 있었다. 병조에서 나온 군사들이 엿새 전에 설치하고 간 깃대였는데 오늘은 양주부사 이승직(李繩直)이 직접 점검하고 있었다.
강바람이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세차게 불곤 했다. 갈대밭 가를 반보쯤 앞서 걷고 있던 이승직이 세종의 명을 받은 감사(監司) 최부(崔府)에게 말했다. 감사와 양주부사는 작년 이른 봄에도 세종이 임강(臨江; 현 임진강)으로 강무(講武)를 나왔을 때 만난 적이 있는 구면이었다.
“감사 나으리. 매나 노루, 멧돼지들이 먹이가 떨어져 산중에서 강가로 내려오는 시기입니다. 전하께서 사냥하기에 더 없이 좋은 때입니다. 감사 나으리께서 강무 날짜를 내일로 택일을 아주 잘하셨습니다.”
“부사께서 전하의 강무 준비를 하느라 애쓰는 모습이 보기 좋소.”
강무란 임금이 궁궐을 나와 군사들과 무예를 연습하고 사냥을 하는 일종의 군사훈련을 뜻했다. 어영청 군사들과 강무를 할 때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비밀리에 실시하기도 했다. 태종이 유독 강무를 좋아하여 세종은 즉위한 뒤에도 매년 태종을 따라 강원도 평창까지 강무를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어느 해는 강원도로 가서 혹한 때문에 이틀 만에 강무를 중단하고 회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강무는 민가에 폐를 끼쳐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해당 고을의 수령은 물론 이웃 고을의 수령들이 관아를 비운 채 특산물을 들고 와 바치거나 농사짓는 농부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했으며, 곧 씨를 뿌려야 할 논밭이 훈련장이 돼 엉망이 되기도 했고, 물길이 깊어 임시다리를 놓거나 도로를 공연히 닦느라 백성들의 고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사복시(司僕寺)에 딸린 말들이나 어영청의 군마(軍馬)들이 먹는 건초를 민가에서 공급하게 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고을의 관리들이 수령의 묵인 하에 양인들을 구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하께서 작년 가을에 하시는 강무는 흉년이 들어 하지 않았사옵니다. 그것은 백성을 돌보신 것이었사옵니다. 겨울에는 교지를 내려 술도 금하였습니다. 감사 나으리. 이번 강무는 어느 때의 강무보다도 각별하실 것 같습니다.”
“유달리 서책을 좋아하시는 전하께서 갑자기 강무를 하시겠다는 것을 보니 아마도 문과 무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태종 전하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것 같소.”
갈대밭 너머로 오리 떼가 날았다. 날씨는 매섭게 차가웠지만 하늘은 투명했다. 사냥하기에 알맞은 이른 봄이었다. 몰이를 하며 땀 흘리는 데는 오히려 차가운 날씨가 더 안성맞춤이었다. 최부가 강바람에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전하께서 몇 가지 금령(禁令)을 지시했소. 부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금령 조목이오. 태종 전하 때와 달리 사복시의 마필(馬匹)이라 하더라도 미리 쌓아놓은 건초나 들풀을 먹이라고 했소. 부족하더라도 민가의 건초를 가져오지 말라는 것이오. 또한 공연한 도로나 다리를 수리한다 하여 사역하는 양인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소. 따라서 그릇 된 관리를 고발하라고 대언사(代言司)를 대동할 것이라 했소. 각 고을에 나간 수령들은 자기 관할의 백성들을 돌봐야지 강무장 경계를 넘어와 전하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말라고 했소. 금령을 어긴 자는 누구라도 어가(御駕)를 따르는 찰방(察訪)이 나서서 즉시 체포 수색하여 논죄할 것이라고 하였소.”
사진=김진호 기자
사복시란 궁중의 말이나 목장 등을 관리하는 기관인데, 그곳에서 길들인 말들은 임금이나 대군들이 탔다. 세종의 명은 비록 임금이 타는 말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의 건초를 가져와 먹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백성을 보살피는 전하의 천품에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양주부사 이승직은 최부의 당부에 고개를 약간 숙였다. 세종은 유달리 사냥을 즐겼던 아버지 태종과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강무를 나가더라도 물품을 조달하는 지응사(支應司)를 두어 양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감사를 보내 고을 수령들에게 금령 조목을 자세하게 전했다.
다음날.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산등성이에는 병조에서 징발한 군사들이 경계를 섰다. 몰이꾼으로 나서게 될 군사들은 운길산 산봉우리 하나를 완전히 포위한 모습이었다. 다만 세종이 행차할 강변에 붙은 논밭은 텅 비어 있었다. 군사들은 임금이 탄 어가가 사냥터에 도착했다는 신호로 북이 울리면 산허리의 산짐승들을 강변으로 몰이할 터였다. 병조좌랑의 작전지시는 간밤에 벌써 군사들에게 내려진 상태였다.
수종사에서 머물던 세종은 사냥터로 향했다. 어가 앞뒤로는 업무가 바쁘지 않은 육조의 대신들과 병조좌랑이 도열해 있었다. 아침 해가 솟구칠수록 호위 군사의 창끝이 번쩍거렸다. 내려다보이는 강은 명주천을 펼쳐 놓은 듯했다. 다행히 강바람이 잦아들어 강무장에 모닥불을 피워도 산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선두에 선 장수들이 탄 군마가 유난히 진저리치며 하얀 김을 뿜어 올렸다.
이윽고 어가가 사냥터에 이르자 장수 하나가 북을 쳤다. 세종의 행차를 강무장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그러자 새벽부터 산등성이에 올라가 있던 몰이꾼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와아! 와아!”
군사들의 함성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산짐승들에게 겁을 주는 함성이었다. 그러나 세종의 눈에는 아직 산짐승이 보이지 않았다. 몰이하는 기병들이 어가 부근에서 비호처럼 산자락까지 내달렸다가 돌아왔다. 도망치는 산짐승을 세종이 있는 쪽으로 유도해 오겠다는 동작이었다. 세종은 어가에서 나와 천천히 말을 탔다. 모닥불의 열기와 연기가 세종의 얼굴에 끼쳤다. 말이 제자리에서 꼬리를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세종이 말갈기를 쓰다듬자 말은 이내 순해졌다. 이윽고 장수 한 명이 소리쳤다.
“멧돼지다!”
생각보다 빠른 산짐승의 출현이었다. 장수의 외침과 동시에 군마를 탄 기병들이 튀어나갔다. 멧돼지는 산과 논밭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기병들은 멧돼지를 어가가 있는 쪽으로 몰아오는 작전을 펴고 있었다. 멧돼지는 놀란 채 소리를 지르며 기병들의 작전대로 어가 쪽으로 뛰려고 했다. 그러자 장수 한 명이 활과 화살을 준비했다. 멧돼지가 돌진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병조좌랑이 세종에게 활과 화살을 올렸다.
세종은 멧돼지가 달려오는 왼쪽 방향으로 말을 타고 가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여지없이 멧돼지 오른쪽 배에 꽂혔다. 세종이 어가 쪽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세종의 동생인 대군들이 쫓아가 활을 쏘았다. 이번에는 장수들 차례였다. 비틀거리는 멧돼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래도 멧돼지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자 군사들이 달려가 돌멩이를 던져 멧돼지의 숨통을 끊었다.
기병 몇 명이 달려가 피흘리는 멧돼지를 가져와 노란 깃발을 단 깃대 옆에 놓았다. 순조로운 첫 사냥이었다. 병조판서를 대신해서 세종을 보필하고 있는 병조좌랑이 큰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감축 드리옵니다.”
그런데도 죽어가는 멧돼지를 지켜보는 세종의 마음은 씁쓸했다. 형인 양녕의 일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군사들에게 사냥을 당한 멧돼지가 양녕의 처지만 같았다. 그러자 마음이 밑도끝도없이 허허로워졌다. 최근 들어 양녕을 논죄하자는 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쳤던 것이다. 대신들의 뜻을 좇아 양녕을 벌주는 것은 폐위당한 형을 두 번 죽이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세종의 마음을 눈치 챈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이번의 강무에 임하는 세종의 마음은 군사훈련이나 사냥에 있지 않았다. 태종의 죽음과 극심한 흉년, 그리고 양녕의 일들로 답답하고 심란해진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것이 세종의 속마음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해가 바뀌자마자 문무관 2품 이상의 관리들 사이에 양녕을 죄를 논하자는 주장이 분분했다. 기어코 2월 중순이 되자 2품 이상 관리들이 양녕을 탄핵하는 봉장(封章)을 올렸다. 강무를 나서기 며칠 전이었다.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이 관리들의 의견을 대변하여 양녕에게 벌주기를 청했다.
신하들이 말하는 양녕의 죄는 한 마디로 패역(悖逆)이었다. 태종이 중국사신과 연회할 때 양녕에게 배석하도록 명하였으나 거짓으로 병을 핑계 대며 기생과 놀아났다는 등의 패역이었다. 신하들은 세종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듯 행동하는 양녕을 눈앞에서 제거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런 까닭에 신하들은 봉장에다 양녕의 온갖 방탕과 탈선을 다 기록해 놓고 있었다. 밤이면 궁중 담을 넘어가 소인의 무리들과 비파를 뜯으며 놀았다거나, 또 그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밤새 술판을 벌였다거나, 심지어는 중추원 부사 곽선(郭旋)의 첩 어리(於里)를 불량배로 하여금 궁중으로 납치해 와 아기를 배게 했다는 탈선까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 일로 양녕을 광주(廣州)로 내쫓았으나 개과천선은커녕 도리어 일하는 양인에게 소주를 먹여 죽이고 고을 기생 두 명을 훔쳤으며 태종이 세상을 떠난 지 겨우 20일 만에 이천 집에서 농부를 불러 김매게 하면서 농부가(農夫歌)를 부르게 하고 종자에게 ‘즐겁다’고 하는 등등 방탕한 짓을 저질렀으니 엄히 죄를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폐위당한 형의 절망적인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신하들의 탄핵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태종 역시도 어리 사건을 듣고 벌 삼아 양녕을 궁궐에서 광주로 내보냈지만 아들의 탈선이 그치지 않자 세종과 함께 수라를 물리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강바람이 다시 불었다. 모닥불의 불티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자 군사들이 급히 강물을 길어와 불을 껐다. 세종은 사냥에 흥미를 잃고 활과 화살을 병조좌랑에게 돌려주었다. 몰이꾼 군사들의 함성은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바람을 타고 크게 들려왔다. 이번에는 노루 두 마리가 기병들에게 강변 쪽으로 쫓기고 있었다.
“사냥을 그만하고 싶구나. 찰방이 앞서 거라. 산책을 할 것이다.”
“전하, 어느 길로 납시겠사옵니까?”
“저 길은 어떠하겠느냐?”
세종이 가리키는 길은 갈대밭 사이로 난 소로였다.
“전하, 어가를 대령하오리까?”
“아니다. 오늘은 무심코 걷고 싶구나.”
세종은 찰방의 제의를 뿌리쳤다. 어가뿐만 아니라 세종을 에워싸는 신하들의 도열도 제지시켰다. 다만 임금의 전후방을 경계하는 어영청 군사만은 병조좌랑의 읍소를 받아들였다.
“전하, 호위하는 군사만은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알았다. 좌랑은 몰이하는 군사들의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강무를 계속하라.”
갈대밭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강물에 몸을 띄우고 있는 오리들이 가깝게 보였다. 세종이 찰방에게 물었다.
“찰방은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겠지?”
“가평으로 가는 산길이옵니다. 역마를 타고 여러 번 지나보았사옵니다.”
“오, 저기도 백성이 사는구나!”
멀리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초가 한 채가 보였다. 강을 등진 채 버섯 같은 모양으로 산허리에 기대고 있는 오두막이었다.
“저기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날이 차가우니 그리 하시옵소서.”
“찰방은 외딴집에 사는 백성이 궁금하지 않은가?”
“전하, 소신이 먼저 달려가 누가 사는지 알아오겠사옵니다.”
“과인의 신분을 밝히어 백성을 놀라게 하지는 말라.”
“네, 전하.”
세종이 몇 걸음 앞서 달려가는 찰방을 보며 중얼거렸다.
‘구중궁궐이라도 마음이 괴로우면 지옥이요, 비록 오두막이라도 마음이 편안하면 극락이 아닐 것인가?’
세종은 순간 양녕의 일로 무거워진 마음에서 벗어나 외딴집 주인이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산중에 사는 백성의 살림살이를 알고 싶어졌다. 어느새 산모퉁이 고갯길을 넘어간 찰방은 보이지 않았다. 산길에는 아침햇살이 금싸라기처럼 떨어져 있었다. 양지바른 산길이어선지 강바람이 순했다. 세종은 한껏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두 팔을 휘휘 휘저으며 호젓한 산길을 걸었다. 이제 몰이하는 군사들의 함성과 북소리는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호위 군사들의 발자국 소리만 크게 들렸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