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입처는 눈 귀 코 혀 몸 의지와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다"
4. 업설에 의한 불교의 우주론 (1)
궁극적 물음에 대한 종래의 종교에 이렇게 문제성이 있다면 궁극적 원리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시작되어야 한다. 진리 탐구의 방법론은 현상 세계의 정확한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궁극적인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 그로부터 다시 현상 세계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보는 방법이어야 한다. 고타마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은 바로 이 길이었고 부처님이 된 다음 전 인류에게 제시한 것도 바로 이 길이었다. 원시경전에 설해진 부처님의 깨달음은 십이연기설을 내용으로 하는데, “모든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생사(현실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무명에 이르고 무명(현실 세계의 원인)으로부터 다시 생사에 이르는 순서로 관찰하신다.”고 설하고 있는 데에서 그것을 엿볼 수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던 세 가지 우주론(존우화작인설, 숙작인설, 무인무연설)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죄악과 의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성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진리 탐구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확정하고 이로부터 그 배후의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의 교설을 볼 때 십이처설은 깊은 관심을 끈다.
일체는 십이입처에 들어간다. 십이처설의 내용은 이와 같다 “눈 귀 코 혀 몸 의지와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다. 불교의 중층적인 교리 조직에서 가장 기초적인 교설이다. 인간의 여섯 감각기관과 그에 대한 여섯 인식대상으로 이루어졌음을 볼 것이다. 우리들이 의지해야 할 바는 인식 가능한 현실 세계이며, 진리 탐구는 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과 상통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 세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인데, 그 주체를 의지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의지의 존재를 엄연한 현실적 사실로 받아들인 것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을 의지로 파악하고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인간이 의지적인 작용을 가하면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는 성질을 띤 것으로 나타난다. 가령 여기 어떤 물체에 5kg의 힘을 가하면 그것은 그 역량만큼의 반응을 반드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은 십이처설은 ‘의지’ 즉 인간의 대상을 ‘법’이라고 규정하고 게시는 것이다. 법이라는 말은 법률이라는 개념으로 흔히 쓰이지만 인도에서는 그 밖에 자연 법칙, 필연적인 것, 의지가 없는 것, 자연물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업에 대해서 그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반응을 ‘보(報)’라고 한다. 업은 원인이고 보는 결과이므로 업인 과보로 표현하기도 한다.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를 것이고 그들의 성질은 상응할 것이다. 선업에는 좋은 보가, 악업에는 나쁜 보가 따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한다. 모든 현상은 반드시 업보의 법칙으로 설명되어야 하는데, 그것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보기 때문이다. 가령 우주의 생성 소멸은 너무나도 신비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악업을 지었는데 잘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착한데 고생만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에는 분명히 의지와 법, 업과 보로 관계가 사실로써 존재하고 부처님께서는 “일체는 십이처에 들어간다.”고 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럴 경우, 다시 말하면 업보의 현실적 사실을 양보하지 않을 경우, 문제의 현상도 일단 그런 업보적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겻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경우, 업 보의 관계는 이제 숙세 현세 내세의 삼세에 걸쳐 전개된다고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시길 “만일 고의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기도 하고 내세에 받기도 하나니라, 그러나 고의로 짓는 없이 없으면 보를 받지 않나니라.”<중아함 권3 思經> 이것이 불교에서 설하는 업설의 원리적인 내용이다.
불교의 이러한 업설에 의할 때 인간의 현실 상황은 그가 짓고 있는 업에 대한 보의 총화總和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은 동시에 그의 새로운 업이 작용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눈앞에 불행이 닥쳤다면 책임은 오로지 자기에게 있는 것이지 남이나 운명이나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타개할 수 있은 것도 오로지 자기 힘이며, 남이나 운이나 신의 힘이 아니라는 것이 뚜렸해진다. 불교의 업설을 흔히 숙명론과 혼돈하여서는 안된다. (계속)
고익진 저 불교의 체계적 이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