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송운대사)은 서산대사와 함께 임진 조국전쟁 시기 왜적을 물리치는데서 이름을 떨친 승병장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임응규이며 법휘는 유정, 법호는 사명당 또는 송운이라고 한다.
사명당은 1544년 밀양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3살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된 그는 불교 공부에 전념하여 벌써 젊은 시절에 불교선종의 교리에 도통한 승려로 이름이 알려졌다. 사명당은 금강산 유점사로 자리를 옮긴 후 여기서 서산대사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사명당은 승려이면서도 얼굴생김과 성격이 승려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승려가 되면 의례히 머리를 깎고 수염마저 깎는 법이지만 유독 사명당은 머리는 깎았으되 수염은 그대로 두었다. 풍채가 좋고 얼굴도 호걸남아답게 생긴 사명당은 성격이 또한 유달리 활달하고 도량이 커서 접하는 사람들에게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가 보통 승려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사명당은 금강산을 진정으로 사랑하였다. 그는 불도를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외에 여가 시간에는 금강산의 명소들을 찾아 돌아다니기를 즐겼으며 때로는 시흥에 못 이겨 시를 읊기도 하였다. 그의 시들 가운데서 만폭동을 노래한 다음의 시가 유명하다.
여기가 인간세상에서
백옥경이라 부르는 곳
유리로 꾸민 골 안
중향성 솟았구나
산마다 폭포수요
봉마다 휜눈 일세
장중한 물소리에
하늘땅도 놀라는 듯
사명당이 이처럼 금강산과 더불어 날을 보내고 있던 때에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왜적들이 성스러운 조국 땅에 기여 들었다. 비록 속세와 인연을 끊은 승려의 몸이었으나 겨레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남달리 뜨거웠던 사명당은 결코 앉아서 염불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나라가 없이 어찌 백성이 있을 수 있으며, 승려가 있을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외적격멸을 위해 부른 서산대사의 호소에 호응하여 관동지방의 승려 300명을 거느리고 순안 법흥사로 달려갔다. 당시 스승인 서산대사가 승병도 총섭으로 임명되었으나 늙은 몸이었으므로 사명당은 부총섭으로서 실지 승병을 지휘하였다.
백호창작사 1급화가 김광일 그림 '범'
그는 각지 의병들과 관군과의 협동작전으로 북상하려는 적들의 길목을 막았고, 1593년 정월 평양성 탈환 전투 때에는 승병들을 거느리고 칠성문으로 쳐들어가 전투승리에 한 몫 하였다.
사명당이 지휘한 승병부대들은 쫒겨 가는 왜적들을 추격하여 무리죽음을 안겼고 그 후 권율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도처에서 원수를 죽였다.
학식이 높고 담대하여 지략이 있었던 사명당은 1594년 봄부터 우리 측 군영의 대표자로서 적진 속에 들어가 주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그는 조선침략괴수의 한 놈인 가또 기요마사(가등청정)을 대상하여 능숙한 외교활동으로 놈들의 오만무례한 침략행위를 준열히 규탄하는 한편 적들의 비밀도 탐지하고 또 적장들 사이의 모순을 이용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만들어 적들의 군사력을 분산,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사명당은 전후에 조선 측 전권 대표로서 일본에 건너가 새로 집권한 일본의 도꾸가와막부와 강화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는 일본 땅에서 당당한 논리와 주장으로 일본 측이 조선에 사죄하고 우리 측이 제기한 강화조건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전쟁 시기에 붙잡혀갔던 3,000명의 조선 사람들까지 데리고 조국에 돌아왔다. 사명당이 왜국 땅에 갔을 때 그곳 왕이 그가 “생불”인가 아닌가를 여러 가지로 시험해보고 또 그를 죽이기 위해 숱한 수를 사용했지만 그의 신묘한 술법에 의하여 모두 허사로 되고 말았다는 내용의 전설도 이때에 있은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중앙미술창작사 채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