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폈을까?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마당으로 나가 확인하는 것이 매화꽃의 개화(開花)를 확인하는 일이다. 남도로 탐매여행을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나도록 집 앞에 심은 매화나무 다섯 그루는 꽃을 피울 줄 모른다. 아침에 한 번, 대낮에 한 번, 저녁나절 또 한 번…. 적어도 서너 번은 매화를 살피는 것이 요즘 일상이 되었다.
매화의 개화시기가 생각보다 느린 것은 개화의 기운이 산령을 넘어 날 듯 전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고로 화신(花信)이란 큰 산령(山嶺)을 만나면 낮은 골이나 구릉을 따라서 굽이굽이 휘돌아 북상하는 것이므로. 높은 산과 고개를 만나면 산허리를 돌아서 북상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아예 바닷길로 우회해 오르기도 한다. 매촌(梅村), 매골(梅谷), 매포(梅浦) 따위의 지명들은 불현듯 찾아와 매화꽃을 피우고 홀연히 떠나는 ‘꽃 전령 길목’의 표지에 다름 아니다.
아무려나, 물오른 매화꽃 몽우리들은 한껏 부풀었는데, 이제 곧 터질 것만 같은 데 좀처럼 개화를 하지 못한다. 터질 만 하면 춘설을 맞고, 터질 만 하면 꽃샘추위가 닥치면서 하루 이틀 개화시기를 늦춘 것이다. 이호우 시인의 표현처럼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라고나 할까. 그러나 날이 조금 풀린 듯싶으면 일단 꽃부터 피웠다가 동상을 입곤 하는 여느 꽃들과 격조와 고결을 달리하는 매화꽃을 견줄 수는 없는 것이니, 기다림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지도 모른다.
오랜 지기(知己)를 기다리는 것처럼 매화꽃을 기다리는 마음이 갈수록 간절해진다. 이제나 필까, 저제나 필까, 매화꽃을 기다리는 마음은 연인을 기다리는 가슴 떨림과 다를 게 없다. 냉이는 벌써 꽃이 펴서 제철이 지났고, 달래는 먹을 만큼 충분히 자랐으며, 머위들도 쌈을 싸먹을 수 있을 만큼 제법 컸는데 어째 매화꽃은 필 줄 모른다. ‘매화야, 너 이러다가는 봄의 전령을 알리는 꽃이라는 별칭을 빼앗길지도 몰라!’ 공연히 매화나무 앞에 앉아 타박도 놓아보지만, 매화나무는 춘풍에 부푼 꽃망울을 흔들 뿐 아무런 대꾸가 없다. 

당진 현묘재에도 매화꽃 화신이 도착했다.

사흘 전! 드디어 청매화꽃 세 송이가 밤새 그 청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와! 매화꽃이 폈다!’ 아침나절부터 환호를 지르며 카메라를 챙긴다. 이제 심은 지 3년 밖에 되지 않는 5년생 매화나무인지라 그 향기를 맡으려면 엎드려 코를 들이대는 수고를 감수해야만 한다. 아! 이 새큰한 향기! 이 환상적인 향기를 전해주려 그동안 그토록 애간장을 태웠는가? 몇날며칠을 마음조르게 했던 원망은 코끝을 저리게 하는 청매향을 만끽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진다.
진달래나 개나리와는 달리 매화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없다. 그러나 매화나무 전체를 매(梅)로 표현하는 중국과 다르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에 화(花)자를 보태 ‘매화’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다시 한국말 ‘꽃’자를 겹쳐 ‘매화꽃’이라고 부른다. 어떻게든 우리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민족 특유의 고집과 성정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매화를 흔히 유교적 꽃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유교가 정착되기 전, 불교에서 먼저 매화를 중요한 화제로 삼은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은 불교가 모례(毛禮)의 집을 통해 신라에 처음으로 전해진 사실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눈 덮인 금교(金橋)엔 눈이 얼어 아직 풀리지 않아
계림(鷄林)에 봄빛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기특도 해라, 봄의 신 꾀도 많아서
모례의 집 매화에다 먼저 손을 썼구나

‘불교의 최초 도래지’의 상징을 일연스님은 이렇게 매화꽃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일본불교의 선종에서도 깨달음의 경지를 자연에 비유하면서 매화를 등장시킨다. 일본 선종에서 매화꽃을 깨달음의 상징으로 본 것은 매화꽃 그대로를 깨달음의 묘경(妙景)이자 묘취(妙趣)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묵조선 전통을 계승하는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인 도겐 선사는 매화를 ‘우리 전 인격체의 바탕에 홀연히 피어있는 꽃’이라고 보았다. 즉 매화는 ‘천상천하유아독존(부처)의 눈동자’라는 것이다. 
중국의 저명한 고승 황벽 선사의 게송은 매화꽃을 주제로 한 선시(禪詩) 가운데 백미로 손꼽을 만하다. 

티끌세상을 벗어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한바탕 일을 치르라.

한번 뼛속을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어찌 매화향기가
코끝 찌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것
귀한 일 아니니,

천길 벼랑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
대장부라 하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수행자가 갖춰야할 결기를 매화향을 소재로 멋지게 표현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매화꽃잎은 5장이 표준형이다. 중국의 철학자 소옹(邵雍)은 이 다섯 꽃잎이 평화, 화해, 행운, 관용, 인내를 상징한다고 풀이했다. 이 다섯 상징은 공교롭게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에 반드시 필요한 요건들이다.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화해’를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과 ‘인내’, 그리고 예기치 않게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는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행운’일 것이다. 올 봄 매화꽃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청매화꽃의 개화를 필두로 하루 이틀 후면 홍매화꽃과 백매화꽃도 차례로 그 환상적인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당분간 매화꽃 향기에 묻혀 누릴 행복에 시골시인의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