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데, 뭘 가장 먼저 해야 하죠?”
불교계 기자라고 뭘 좀 아는 줄 알았는지, 어느날 후배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갓 수습 딱지를 뗀 나는 그때 참선을 하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면 탈이 나듯이, 그 질문은 이후 항상 나를 따라 다녔다. 삼법인과 육바라밀이 아닐까, 부처님 일대기가 먼저일까, 위빠사나라고 답할 껄 그랬나. 몇해 뒤 이 이야기를 전하자 아는 지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팔만사천 법문보다 먼저인 것이 원력이다. 그리고 원력보다 앞서는 것이 신심이다.”
갑자기 뒷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은 수년간의 의문을 단번에 해소시켜 주었다.
최근 신문사로 두권의 책이 배달되었다. 제주 약천사 주지 혜인 스님이 수십여년간의 법문을 묶어 두 권의 책으로 펴냈는데,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신심』과 『원력』이었다. “수많은 법문을 요약하고 또 요약하니 신심과 원력이더라”는 이야기를 그 책은 말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혜인 스님의 글은 무척 쉽고 부드러웠으며, 강력했다. 다 쓰러져가는 제주 약천사를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관광사찰로 만든 힘, 그 힘의 원력은 기도의 힘, 믿음의 힘이었다.
스님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약천사 짓게 된 이유를 들려주었다. 스님이 약천사를 짓게 된 것은 제주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한 신혼부부 때문이었다. 그 신혼부부는 스님에게 초와 향을 건네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님께서 제주도에 신혼여행을 가면 부처님께 향과 초를 올리고 백년회로를 빌라고 당부했는데, 제주도에서 절을 찾지 못해 결국 공항까지 들고 오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부디 이 향과 초를 부처님께 올려주십시오.”
이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 누구나 쉽게 들를 수 있는 사찰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출가하고 나서 15년간 양말 한짝 사주는 이 없는 가난한 승려가 제주도에 좋은 사찰을 지을 방법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이후 스님의 기도와 원력은 제주도에 널리 알려졌고, 제주도를 넘어 내지에까지 이르렀다. 명강사로 소문이 자자해진 스님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기도와 법문을 하며 모은 시주돈으로 8년여에 걸쳐 대불사를 진행했다.
“길이 아니라도 불도저가 지나가면 길이 생기게 마련이다. 불교는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과 팔자는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다. 소나무를 의지해 칡넝쿨이 소나무를 타고 끝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잔디밭에 깔린 풀은 석자도 올라가지 못한다. 누구나 부처님과 부처님 말씀 그리고 가피력에 의지하면 얼마든지 행운과 훌륭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모두 깊은 신심을 갖고 기도정진하는데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스님의 이야기는 직접 기도정진의 힘을 경험하면서 나온 체험담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힘이 있고,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다.
또 출가한지 40여년만에 속가 어머니를 찾은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에 한가득 눈물구덩이를 파놓는다.
“15세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스님의 길을 걸은 지 어언 40여년이 넘어 처음으로 찾아 뵙고 생일인사를 드리자, 오랜 세월 고생하고 걱정하신 어머님께 죄송하면서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어머님을 위한 생일 불공을 처음으로 올려 드렸는데, 그해 12월 어머님은 노환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머님을 찾아뵈니, 어머님은 아들을 알아보시고 ‘혜인이가 왔구나’ 하셨습니다. 혼수상태에서 다행이 의식이 살아나셔서 숨을 쉬며 알아보신 것입니다. 그날 이후 약천사로 모셔서, [중략] 어느날 아침에 문안인사를 올리고 아침공양을 하러 갈 시간이 됐는데, 그날따라 마음이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공양을 거른 채 어머님 곁을 지키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어머님을 위해 염불을 했습니다. 비록 불효자였지만 입적하는 순간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염불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하루만이라도 인간의 자식된 도리를 했다는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모와 자식 관계가 단순한 세속의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도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더욱 좋은 인연으로 마침내는 깨달음의 도반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가꿔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책인 원력은 스님이 법문을 통해 전한 영험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단순한 진리를 스님은 너무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려준다.
스님은 독자들에게 “뿌리가 튼튼한 나무가 되라”고 당부했다. “믿음이 확고하면 바른 삶의 길이 저절로 확립되고, 모든 선의 뿌리를 자라게 하여 더욱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능히 감당하지만, 그렇지 못한 나무는 조그마한 강풍에도 넘어지고 만다. 삶을 의미있게 살려면 선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믿음이 바로 선업의 뿌리를 깊고 넓게 내리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고.
고은 시인은 스님의 책을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무서운지고! 무서운지고./ 20년간 잠과 잠 사이 오로지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을 부른 공덕/ 어찌 이 찬란한 발원과 신심이 천년 정토 이루지 못하랴./ 한국불교의 오늘 이런 스님의 바다 성품 계시어 새로 열리는구나./ 장엄한지고 여기 가장 어려운 길이 가장 쉬운 길라잡이를 만나 훤히 트였구나./ 이 길 따라 가고 가면 되는구나.”
정말, 혜인 스님의 글을 술술 읽다보면 나도 ‘그곳’에 도달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