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로 들어갈 때에는
모든 사람은 모두 자기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요. 어떤 이는 남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살면서 자기의 세상인줄 알고, 또 어떤 이는 남의 세상도 자기만의 세상이라며 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세상 세상은 각각의 울타리로 막혀 있어서, 보이는 울타리로 또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로 둘러져 있습니다.
화성행궁에도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둘러져 있는데,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한 겹의 문이 홍살문입니다. 홍살문은 궁궐․관아․향교 입구 그리고 천왕문에서 사천왕 앞에서 볼 수 있는데, 신성한 곳을 나타내고 또 사악함의 접근을 막는다고 하지요.
화성행궁 앞 홍살문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는 팥죽 색깔로 기둥이며 화살 낱낱을 단청하여, 악귀가 행궁으로 들어설 엄두를 못 갖게 하는 의미가 있는 문입니다. 미리 막아서 뒤탈을 없게 해야지, 들어 온 다음에는 쫓아내기 어렵다는 걸 알고계신 조상님들의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겉모양만 보아서는 사람을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 행궁 출입자격을 겉모양으로 또 속마음을 알아차려 제한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행궁 앞에 맑은 물에 스스로 마음을 씻고 들어오라는 뜻으로 신풍교를 놓았습니다.
신풍교에 흐르는 물은 행궁 뒤 팔달산 샘에서 시작된 물인데, 풍수지리에서는 ‘물길이 좋은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하네요. 어쩌면 행궁 바로 앞에 물길이 가로질러 흘러가도록 한 것은 좋은 집터의 기운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한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하마비
행궁 앞에 하마비가 있다는 것을 빠트렸습니다. 통상 ‘큰사람 ․ 작은사람 ․ 높은사람 ․ 낮은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라(大小人員皆下馬)’를 새겨 놓는데, ‘말에서 내려라(下馬碑)’라는 한마디로 자른 것은 왕이 계신 곳이니 토 달지 말고 말에서 내려 존경을 표하고 걸어들어 오라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홍살문과 신풍교 그리고 하마비 등을 놓는 것은 스스로 몸과 입과 뜻(身口意)을 깨끗이 하여야,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이 진실될 수 있다는 가르침의 상징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으니
1790년 정약용이 대간의 탄핵을 받고 사직원을 제출하자 정조는 사직하지 말 것을 권하는데, 그래도 계속 고집하자 괘씸죄를 적용해 해미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러나 유배기간은 겨우 열흘뿐,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온양온천을 즐기다가 그곳 백성들에게 사도세자가 1760년 온양행궁 행차에서 행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귀염을 받는 정약용은 복직해서 들은 이야기를 당연히 정조에게 전하고요.
삼정승 나무
제가 들었는데, 사도세자께서 수행하던 군인들의 군마가 백성의 밭을 망쳐놓았다는 것을 알고 배상해 주셨고, 활터에서는 다섯 발을 쏘아 다섯 발 모두 과녁의 곰 눈을 명중시킨 다음에 손수 회나무 한 그루를 심으시면서 ‘품(品)자 형태로 두 그루를 더 심어서 뒷날 그늘을 드리우게 하라’고 명하셨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정조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인가 하고 노심초사하는 중인데, ‘옳다구나’ 하고 정조는 온양행궁 활터에 사도세자의 행적을 기리는 “영괴대비”를 세워놓습니다.
그리고 화성행궁 앞에는 온양행궁과 마찬가지로 150년이나 된 느티나무를 구해 ‘품(品)’자 형태로 심게 합니다.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이 이 나무 아래에서 어진 사람을 맞이하여 올바른 정치를 베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는 덤입니다.
이 나무들의 나이는 거의 400살이 되었으며, 1795년에 세워진 ‘영괴대비’는 온양관광호텔로 바뀐 온양행궁 터에 남아있습니다.
진남루로 남아있었으면
화성행궁 처음 건축 시에는 정문의 이름이 ‘남쪽을 진압하는 누각’이라는 “진남루(鎭南樓)”였는데, 이 진남루라는 이름은 수원부(구읍치)를 보호하는 독산성의 남쪽에 설치한 누각이름이었습니다. 독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주둔하면서 왜병 수만 명으로부터 성을 지켜내고, 왜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유명한 산성이지요.
진남루라는 누각은 수원 말고도 여수 ․ 경주 ․ 공주 등 여러 곳에 있는데, 이렇게나 곳곳에 있다는 것은 남쪽에 있는 왜적이 지긋지긋하게도 싫었기 때문일 겁니다.
신풍루.“화성행궁”은 정조의 어필
현륭원을 천장한 다음 해(1790년)에 순조가 탄생하는데, 정조는 순조가 태어나자 ‘아들(훗날 순조)에게 할아버지(사도세자)를 추승하게 하자’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순조가 왕으로 즉위하여 정치를 하자면 열다섯 살은 되어야 하는데, 열다섯이 되는 1804년(갑자년)에 왕권을 넘겨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서 조선의 개혁을 완수하자는 큰 계
획을 구상하고 차례차례 실천에 옮깁니다.
그리고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첫 이야기의 시작“이번 가을엔 수원을 방문하세요”에서 나왔던 정조대왕 능행차(을묘원행)가 거행된 1795년이 됩니다. 이 능행차에 앞서 정조는 “진남루”라는 이름을 “신풍루(新豊樓)”로 바꾸지요.
신풍(새로운 풍)의 유래는 한고조의 고향 “패군(沛郡) 풍현(豊縣)”에서 시작된 것으로, 중국과 조선에서는 제왕의 고향을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전주(이성계의 관향)를 “풍패지향”이라 부르고, 그곳에 “풍남문”을 세운 것이지요.
이렇듯 정조는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나 머물 곳은 화성행궁이고,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곳, 그리고 자기가 묻힐 곳도 수원이라는 생각으로 ‘수원을 제왕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의미를 담아 신풍루로 바꾼 겁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렸듯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유로 파괴되는데, 만약 정조가 이름을 바꾸지 않고 진남루로 그냥 두었다면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고 진압되었을까요?
아직도 신풍루에 남아있는 따스함
정조는 혜경궁의 화성행궁에서 회갑연을 치룬 다음 날 신풍루 앞마당에서 구휼행사를 벌립니다. ‘굶주린 배로 긴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 행사는 새벽 6시부터 진행됩니다.
그 당시에도 사민(홀아비․과부․고아․노인)은 소외계층이었는지 이들에게는 쌀을 나누어 주었고,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죽을 먹여주었습니다.
을묘원행정리의궤에 수록된 신풍루사미도 일부분.
신풍루 2층에는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옥좌가 놓여 있습니다.
정조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승지들은 각각 사창․산창․해창으로 가서 혜경궁의 은혜에 의해 쌀을 주고, 죽을 먹이는 것임을 알게 하라. 시간이 아직 이르니 혹시라도 미처 오지 못한 자가 있으면 차례차례 알려 한 사람이라도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신풍루 앞에서는 내가 마땅히 친림하여 나누어 줄 것이다’라는 지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실록에는 정조가 ‘묘시 초3각(오전 5시 45분)에 정조임금께서 신풍루에 나와 말에서 내려 2층 누각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선전관은 죽 한 그릇을 가져오라. 내 마땅히 죽 맛이 어떠한가를 보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날 혜택을 본 사람은 수원부민의 10분의 1 정도인 5352명이었고, 지출된 쌀은 370가마가 넘었습니다. 이런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정조가 된 사람이라는 것은 왕명이라는 지시로 끝내지 않고 생명을 지켜주려는 베품을 실천하였으며, 백성들의 가슴에 ‘불쌍한 너희들 안에 내가 있다’는 사랑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진정한 보시를 이루어내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이만 그치고, 다음 차례에는 화성행궁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