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타스님이 들려주는 금강산 전설] 14 수미암의 원효대사와 영랑선
신라시대의 이름난 승려 원효는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공부할 곳을 찾아 금강산 내금강을 향하였다. 내금강의 여러 곳을 돌아보며 경치도 좋고 수행하기에도 마땅한 곳을 찾아 거처를 정하려고 수미동으로 들어왔다. 수미동에 들어서니 골짜기에 펼쳐진 기암절벽과 , 아름다운 소沼들이 걸음을 붙잡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 산천에 엎치락뒤치락 굽이치며 흐르는 계곡물이 아름다운 소에 머물렀다가는 다시 흐르고 계곡 양쪽에 솟은 봉우리들은 만물상을 연상 시키는 듯 갖가지 형상을 늘어놓았다.
수미동 골짜기는 들어 갈수록 앞이 널찍하게 열렸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계곡을 따라 올라 가면 연이어 폭포와 소들이 나타나 수미칠곡담, 수미팔곡담을 이루고 있다. 참으로 앉으면 일어서기 어렵고 일어서면 떠나기 아쉬운 절경들이었다.
골짜기에서 동쪽 산비탈로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험한 바위 벼랑 모서리를 붙들고 따라 오르니, 평평한 바위 위에 옛 절터인 듯 한 곳이 나타났다. 원효는 여기서 앞을 바라보니 보이는 고개를 넘어가면 마땅한 자리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보니 펼쳐진 절경이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또 있으랴 싶었다.
참으로 극락세계로 가는 문 앞이라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수려한 경치라 생각하며, 이곳에 암자를 지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원효는 이곳을 극락재라 이름하였다.
이 터는 올라올 때는 겨우 기어서 오르고 내려갈 때는 엉덩이를 땅에 대고 미끄러지는 수밖에 없었다. 옛날부터 이 고개를 내려가려면 엉덩이 걸음으로 7리를 간다고 하여 “둔행칠리”라고 하였다. 그러니 여기에 토굴을 짓고 수행하면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수미동 막바지에 토굴절 세웠다. 이 절이 바로 훗날 수미암이다.
아담한 토굴을 지어놓은 후 원효는 바람과 달을 벗 삼아 하루하루를 오로지 불교의 깨달음의 경지를 터득하는데 바쳤다.
‘내가 금강산을 찾아 들어온 것은 한 점의 티끌도 묻지 아니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벗 삼아 그 속에서 마음의 번뇌와 슬픔을 벗어난 경지를 이루어 오로지 법다운 수행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발원을 이루고자 함이였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벗 삼아 그 속에서 자연의 미묘한 이치 속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향해 나갔다.
청명한 봄날이나 단풍이 붉게 타는 가을날에는 봉우리들을 따라 올라가 온 종일 행선行禪을 수행하고 해질녘에 내려오기도 하고 평평한 전망대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온 종일 삼매에 들기도 하였다.
경전을 읽다가는 산등성이에 펼쳐진 수려한 풍경을 끝없이 바라보았다. 그 풍경은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새로운 모습으로 안겨왔고 보면 볼수록 더욱 아름다운 자연의 이치를 보게 되었다. 그는 눈앞에 바라보이는 봉황바위, 장수바위의 미묘한 풍경에 심취하여 바라보다가 문득 노장바위에 눈길이 멈추었다.
그때 “노장님 노장님”하고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원효는 약간 고개를 돌려 돌아다보고는 다시 본래의 자세로 극락 재를 바라보았다.
이때의 원효의 모습은 마치 “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에 들어선 나를 누가 찾느냐.”하며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낮에는 자연의 황홀한 경치를 돌아보며 그 속에서 삼매 수행에 들었고 밤에는 늦도록 촛불과 마주 앉아 경전을 읽었는데, 자정이 넘는 것도, 날이 새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밤 원효는 밤 늦도록 경전을 읽다가 그만 몇 해를 두고 한 번도 꺼트린적이 없는 화로 불을 사그라지게 하였다.
자정이 넘도록 경전을 읽다가 손발이 얼어드는 것을 느끼고 화로 불을 헤집었다.
“아니 불이 다 사그라졌구나. 불이 다 사그라졌어.”
원효는 사그라진 화로의 재속에서 불씨라도 남아 있을까 하여 다시 헤집었다.
그런데 어찌하랴. 불씨조차 남지 않았으니, 그는 그만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인적 없는 산속 암자에서 어디서 불씨를 구한단 말인가.”
불을 피울 수 없게 된 그의 근심은 컸지만 당장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추위와 피곤이 몰려와 원효는 불 꺼진 화로를 껴안은 채 깊은 잠이 들었다.
첫 새벽이 되었을 무렵에 마당에서 인기척이 나는듯하여 깨어 보니, 추위에 움츠렸던 자기 몸이 훈훈한 방안에 다리를 쭉 펴고 편안히 누워 있었고 화로에는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아, 불”
원효는 놀랐다.
“누가 피웠을까?”
원효는 두리번거리며 방안을 살피기도 하고 일어나 밖을 내다보기도 하였지만 안도 바깥도 인기척 없이 조용하였다. 이상한 일이라 생각되었지만 알 길이 없었던 원효는 그 날도 온종일 경전 읽기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생각나 화로를 만져보았다. 그런데 또 불이 다 꺼져있었다.
“아뿔사, 내가 미처 불 생각을 또 못했구나.” 원효는 스스로 자책하며 자리에 누웠으나 몰려오는 찬 기운에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있는데, 소리 없이 방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니, 홍안에 수염이 보기 좋게 드리운 어떤 사나이가 조용히 들와와 화로 앞에 마주 앉아 부젓가락으로 화로의 재를 모아놓고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는 살아난 불 위에 나뭇가지 몇 개를 올려놓고 화로 전을 우그렸다 폈다 몇 번 하였다. 그러자 화로 안에는 참숯이 한 가득 담겨 이글거렸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 사나이는 한동안 화로의 불길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원효는 얼른 일어나 그를 불러 세웠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원효가 이렇게 다그쳐 물으니, 그 사람은 빙그레 웃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비로봉이 가까운 수미동 웃머리에 사는 신선 영랑이요.”
“신선께서는 어찌 알고 이 밤중에 산을 내려 소승의 방에 꺼져가는 불을 살펴 주십니까?”
원효는 영랑신선의 고결한 풍채와 자비로운 마음에 감격하여 진심으로 감사해하며 물었다.
영랑신선은 오히려 겸손한 자세로 대답하였다.
“덕망이 높으신 대사께서 수행하시는데 도움 될 일이 참으로 이 밖에 더 없어서 그랬소이다.”
그 말에 원효는 고맙고 송구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렇게 서로 존경하며 원효와 신선은 자주 만나 깨달음의 이치를 논하고 산수도 즐기면서 때로는 영랑이 사는 비로봉 봉우리에도 올랐다.
깊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원효는 “해동종”의 시조가 되었고 “금강삼매경론소”, “십문화쟁론”, “화엄경소” 등 수 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었다.
원효는 자기를 도와준 영랑신선을 잊지 않으려고 그가 사는 봉우리를 “영랑봉”이라 하고, 함께 경전을 논하던 수미암 왼쪽 봉우리의 전망대를 “영랑대”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