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그룹이 고위직을 독점하고 있는 조직이 나라의 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필자
■ 이병두 칼럼 ■ <종교평화연구원장, 종교 칼럼니스트>
생물학자 최재천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라는 명문 코스를 거친 사람이지지만, “나 잘 났어!”라고 내세우는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책을 읽다가 아주 작은 오류나 오자가 발견되어 이메일로 알려주면 공손한 답장을 곧바로 보내오기도 한다. 한창 잘 나간다는 유명인사가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
그는 말한다. “환경은 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해 왔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개체군은 바로 유전적 변이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진정 섞여야 건강하다.”(『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Darwinian Interlligence』, 최재천지음/ 사이언스 북스. 51쪽)
‘섞여야 건강하다’는 것은 진화 생물학에서만 진리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조직도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는 조직이 건강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외면하고 특정한 그룹이 조직을 장악하게 되면, 얼핏 느끼기에는 업무 효율성이 높아지고 원활하게 가동될 것 같이 보이던 조직이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이곳저곳에 숨어 있던 불만의 목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오면서 조직을 망가뜨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 지난 11월 28일 단행된 경찰청 간부 승진인사로 경찰 내 치안정감 6명 가운데 경찰대 출신 2명, 간부후보 출신 2명, 고시 특채 2명으로 고루 분포됐다는 보도는 고무적이다. 이와 같은 고위직의 고른 분포는 경찰 조직 전체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실상은 경찰대를 살리는 데에도 기여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군 쪽의 사정은 ‘섞여야 건강하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합동참모의장 이순진(3사 14기), 육군참모총장 장준규 (육사 36기), 제1야전군사령관 김영식(육사37기), 제2작전사령관 박찬주(육사37기), 제3야전군사령관 엄기학(육사37기),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지상구성군사령관 임호영(육사38기) 등 총 여섯(6) 명인 육군대장 보직 중 3사관학교 출신인 합참의장 한 명을 빼고 나머지 다섯(5) 명을 모두 육사 출신이 차지하고 ROTC 출신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위의 국방부 장관과 청와대 안보실장까지 육사 출신이 차지하고 있으니 이 나라 안전보장을 책임지는 인물들이 모이면 육군사관학교 동문회 축소판이나 다를 바 없다. 과연 이런 조직이 건강하게 유지되고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법조계 사정은 어떤가. 검사장 급 이상 검사의 62.5%, 대법원 판사와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70% 이상이 서울대학교 법대 출신이라는 보도가 알려주듯이, 사법부와 검찰은 똑같이 사법고시를 통과해 사법연수원 교육을 받은 인물들 중에서 특정 대학이 고위직을 거의 독점하고 있어서 문제가 심각하다. 아마 앞으로 오랜 동안 이 문제는 풀기 어려울 것이고, 그 부담은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지만,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는 특정 그룹에게도 결코 이롭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점하면 그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적이 많이 생겨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국방부와 검찰 ‧ 경찰을 제외한 일반 행정부처는 어떤가. 이곳에서는 행정고시 출신과 7급 ‧ 9급 임용고시 출신 사이의 장벽이 매우 높아서, 비(非)고시 출신이 고위공무원으로 승진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그래도 ‘섞여야 건강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아서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의도적으로 고시와 비고시 출신들을 골고루 섞으려는 노력을 하는 시절도 있었고, 장관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부처마다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어느 중앙부처의 경우 그래도 몇 해 전까지는 1급 실장 4~5명 중 비 고시 출신 한 명을 배치하고 국장 자리에도 2~3명을 배치하였다. 7급과 9급 출신 공무원들은 힘든 업무를 하는 가운데서도 이 선배들을 모델로 여기며 각자의 꿈을 키우기도 하였고, 이런 것이 업무 능률을 높이고 조직을 살리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1급 실장은 말할 것도 없고, 본부 국장 전원을 고시 출신으로만 채우고 소속기관을 포함해도 비 고시 출신은 단 한 명만 승진시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이런 조직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순실-차은택의 융단 폭격으로 이 부처가 침몰 직전까지 떠밀려 가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다시 한 번 최재천의 말을 들어보자. “환경은 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해 왔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개체군은 바로 유전적 변이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진정 섞여야 건강하다.” 지금 나라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설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이럴 때에 특정 그룹이 고위직을 독점하고 있는 조직이 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아니 제대로 살아남기라도 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 네이버 블로그 <香山의 세상이야기 - 葉落糞本>에 실린 글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미디어붓다>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