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페스 포럼] 부처님오신날 기념 대담
종교 및 평화 연구자들이 구조화된 폭력적 현실을 진단하고, 종교의 초라한 실상을 폭로하면서, 평화를 상상하는 토론모임을 만들었다. 토론회의 이름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REPES)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레페스 포럼’의 멤버들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원음방송 <둥근소리 둥근이야기>에 출연해 생방송 대담을 나눴다. 가톨릭, 기독교, 원불교에서 바라본 종교, 문화로서 불교의 가치, 사회적 역할, 과제는 무엇일까?
토론자는 다음과 같다.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
원익선 (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병두 (종교칼럼니스트/ 북칼럼니스트, 전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종교평화연구원장) *사회 및 진행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레페스 포럼’ 멤버들의 부처님오신날 기념 대담이 지난 5월 13일 원음방송 <둥근소리 둥근이야기>에 생방송으로 방송됐다.
이병두 : 불기 2560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국내 주요 종교계 전문가들과 함께 ‘부처님 오신 날’이 이 시대에 주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다. 먼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불자들에게 축하인사 부탁드린다.
원익선 : 모든 불자님들 축하드린다. 나는 불교와 원불교가 같은 집안이라고 생각한다. 원불교 모든 분들을 대신해서 축하 인사말씀을 드린다. ‘부처님 오신 날’은 인류 모두의 생일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위대한 불성을 발견하셔서 인류 문명에 빛을 비춰주셨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도 위대한 발견을 하셨다고 생각된다. 부처님이 정신문명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만드셨듯이 어려운 시대를 넘어서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불탄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찬수 : 나는 개신교인이다. 그런데 내가 기독교를 몰랐다면 속이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말은 예수라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 것처럼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기만 해야 할까? 부처님으로 인해서 인류가 큰 부담을 짊어지고 사는 게 아닐까? 반 농담, 반 진담으로 드리는 말씀이지만, 부처님이라는 이정표를 갖고 살게 된 것이 많은 불자님들께 부담이면서도 힘 들겠다 싶다. 그러나 나도 불교 공부를 통해 사상적 전환을 경험했다.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 오신 날을 맞게 되신 걸 축하드린다.
김근수 : 부처님은 예수님보다 640년 전에 오셨고, 예수보다 45~6년을 더 사셨기 때문에 그저 부럽다. 나는 부처님을 볼 때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 보다 더 마음이 편하다. 절에 가면 큰형님 큰누님을 뵌 듯 편하고, ‘부처님 오신 날’이 가톨릭 신도들에게도 기쁜 날이고, 부처님은 예수님과 더불어 가톨릭 신도들에게도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아주 쓸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이병두 : 부처님은 전설, 기록상으로는 아주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아기를 낳으러 가는 도중에 룸비니라고 하는 작은 동산에서 태어나셨다. 일주일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이모의 양육을 받았다고 한다. 왕궁이 아닌 길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는 고통을 겪었다. 이런 기록과 전설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의 탄생, 생애와 비교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김근수 : 예수의 탄생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 장소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에서는 성서학자들도 많은 논란이 있다. 불교에서도 ‘역사의 붓다, 붓다의 역사’ 같은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처의 탄생이 전설이냐 설화냐, 역사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느냐 여부를 가리기 보다는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와 메시지를 우선 보고 싶다.
예수님처럼 부처님도 현장을 돌아다니셨다. 그리고 고통 받는 중생을 우선으로 선택하셔서 스스로 고통을 받으신 분이다. 불교는 돌아다니는 걸인(乞人) 종교를 창시했고 예수는 노숙자 종교를 창시했다. 부처님이나 예수 둘 다 가난을 선택했다는 것을 보면 두 분이 만나시면 하실 얘기가 많을 듯하다.
이찬수 : 부처님 탄생과 관련한 신화적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데 신화적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의미가 중요하다. 가령 예수가 성경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학자들은 그곳보다는 나사렛이 아닐까 추측한다. 성경에 베들레헴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한다는 전승 속에서 형성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것처럼 부처님이 추측컨대, 7일 만에 어머님을 여의었다는 전설은 신화적으로 완전수(完全數)인 7이라는 숫자에 부여된 의미와 당시 남성보다는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여성과 단절됐다’는 의미를 담은 후대의 상상이 아닐까?
이병두 : 7이라는 숫자를 들으니 생각이 나는데, 전설로는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과 함께 ‘삼계계고 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앞부분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한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있으니 내가 그들을 편하게 해야겠다’라는 이 뒷부분을 요즘 많이 놓치고 있어서 안타깝다.
원익선 : 부처님 일생 자체가 우리가 본받아야할 삶의 모습이라고 본다. 신화적인 면도 있지만 전승적인 부분에서 볼 때 부처님의 삶과 우리 삶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할 것이다. 부처님은 개인의 고통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으시고, 고통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고통을 해결하려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가장 아픈 곳에 가있어야 하지 않을까? 보통 부모님의 사랑을 자비라는 말로 쓰는데, 부처님은 그 앞에다 대(大)를 붙여서 대자대비라는 말을 쓴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을 자식으로 생각하고 살아오지 않으셨나.
이병두 : 모든 불자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아당안지(我當安之)하겠다는 것에 의미를 크게 두면 좋겠다.
김근수 : 나는 부처님의 안시(眼施), 너그럽고 측은한 마음으로 사물과 인간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수가 성서에서도 보였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병두 : 지금 우리나라 불상들은 엄숙하게만 조성되고 있지만, 경전과 율장에서 드러나는 부처님의 원래 모습은 꼬마들이 달려와서 언제든지 손 붙잡고 이야기하고 그러는 분이었고, 그런 모습들이 간다라 미술품을 보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왜 요즘은 그게 아닐까? 한국의 불자들이 믿고 실천하는 불교는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많이 변했다.
이찬수 : 부처님 당시 가르침이 오늘날 많이 변했다고 하셨는데 그건 당연하다. 객관적으로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그러니까 그 적응해 가는 과정에 변하는 건 당연할 텐데 어떻게 변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또한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부처님 같은 엘리트 급의 종교적 천재를 후대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것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이 후대에 전승되고 이론화 되는 과정에서 자꾸 심오해지면서 민중들은 못 알아듣게 되고 기복적으로 가고 ……. ‘심즉불(心卽佛)’,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는 선불교 언어는 너무나 혁명적이고 멋지고 쉬워졌지만, 너무 쉬워지다 보면 그 가운데 담긴 역설적 어려움이 있는데, 쉬움에서 새로운 것이 와 닿지 않다 보니까 일반 민중들과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병두 : 모든 것은 변화되어야 하지만 변질 돼서는 안 된다. 일종의 변질은 없을까?
김근수 : 나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크게 긍정적인 것 두 가지를 꼽고 싶다. 먼저는 평등사상, 두 번째는 연기 사상이다.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특징이자 예수의 특징이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 연결됐다. 이러한 연기사상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론(原罪論)으로 표현된다. 이것을 저는 부처님의 특징이자 부처님과 기독교의 공통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정적인 면을 꼽자면 첫째, 옛날 서양에서는 ‘예수 Yes’, ‘교회 No’라는 말이 있었다. 최근에는 ‘예수 Yes, 교회 No, 성직자 No No’ 로 발전됐다. 그런데 지금 보면 ‘부처님 Yes, 불교 No, 스님 No No’가 되지 않았나. 불교에서 출가자 우선주의를 빨리 버려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직자 중심주의와 같다.
두 번째는 깨달음과 수행이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것보다도 지금 한국불교는 불교개혁이 더 중요하다. 선방에서 가부좌 틀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타고 있는 조계종이라는 집을 어떻게 청소할 것인가가 문제다.
이병두 : 불교가 이 땅의 대중들의 삶에 기여한 것은 없을까?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발행인
김근수 : 불교는 인생에서 가장 평범하게 상식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공적이 있다고 본다. 돈, 권력, 명예 등 인간들이 누구나 인정하는 우선순위를 뒤집어엎고 다시 돌아보게 하고, 거꾸로 보게 하고, 다른 면에서 보게 하는 …… 절대화에 대한 거부가 불교의 큰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도 막을 수 있고,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을 최고로 보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부처님 ‧ 스님을 절대화 하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이찬수 : 문화적 차원에서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듯이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현실주의자다. 내가 어디서 왔나 별 관심 없고 어디로 가나 별 관심 없으며, 대체로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면 좋겠다, 이 정도가 한국 사람들의 오랜 기질인 것 같다. 근데 나는 불교를 통해서, 불교의 윤회사상을 통해서 한국 사람들이 ‘내가 어디서 왔지?’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되고 죽음 이후의 상상을 하게 되면서 세계관을 확장시켜줬다고 생각한다.
또, 형식적 예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개인의 내면을 돌아보게 해준 것 같다. 나에 대한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요청한 것이 불교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민중이나 대중의 삶에서 보이지 않게 끼친 영향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이병두 : 두 분의 말씀을 듣고 보면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은 내면적인 것인데 현실적으로 불교는 유형으로 드러난 건물, 문화재 등을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으로 삼고 있어서 안타깝다.
원익선 : 부처님의 인생을 보면 세 가지 위대한 점이 있다. 첫 번째로 부처님은 위대한 포기를 하셨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얼마든지 권력과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는데 다 포기하셨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 명예, 권력이 영원할 것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두 번째는 위대한 자아부정(自我否定)을 하셨다. 우리는 자아가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그것을 부정하셨다. 그래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의 소용돌이로부터 얼마나 벗어나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위대한 희생을 하셨다. 49년 동안 길 위에서 중생을 위한 구제활동을 하시다가 길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런 것을 보면 ‘부처님을 왜 존경 하는가?’ 하는 것이 그 점에서 드러난다고 본다. 결국 우리 삶이 가족을 위한 희생에서 살아가는 것도 있지만 ‘부처님 오신’날‘을 계기로 함께 살아가는 세계와 함께 공동체의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과연 나만 잘 살면 되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깊이 성찰해봤으면 좋겠다.
이병두 : 위대한 포기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출가라는 단어를 영어로 표현할 때도 ‘renunciation, 포기’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과연 부처님 제자들이 위대한 포기를 하고 있을까? 그것을 체득하고 있다면 대형 건물, 불상을 짓는 일을 하지 않을 텐데. 이웃종교인으로서 제발 하루빨리 불교가 이것을 고쳐줬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
이찬수 : 가끔 절에 가면 보기 싫은 것이 중창(重創)불사다. 그런 것이 없는 곳을 거의 못 봤다. 나뿐만 아니라 불교도들 중에도 그렇게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좀 아쉬운 부분이 가령 템플스테이 같은 프로그램 운영에 많은 세금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문화적 차원에서는 중요한 일이지만 불교 자체적으로 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일반인들이 알면 실망을 좀 더 할 테고 그게 결국은 불교 제살 깎아먹기로 작용하지 않을까?
원익선 : 불교 역사를 보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그 당시부터 갑자기 깨달음을 얻으셔서 하늘에서 돈이 쏟아진 게 아니다. 종교 발전은 위대한 정신에서 나온다. 위대한 정신을 인류 문화를 위해 다 바치는 재가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불교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불교는 국가와 긴밀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본의 도원선사가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 포교를 하는데, 한 제자가 권력 있는 무사들이 준 토지 증서를 받아와서 법당을 새로 지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도원선사가 그 제자를 쫓아내고 승적에서 파내고 앉았던 자리를 퍼서 버릴 정도로 엄격하게 국가와의 관계를 정립하셨다.
원익선 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도원선사가 창종한 조동종은 일본에서 현재 15,000개의 사찰을 가진 선종의 발전된 종교가 됐다. 일반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평범함 속에서 불법을 전하는 그런 교단이 됐다. 물론 국가와 긴밀하게 협력해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것은 좋지만 종교발전에 원칙이 어디에 있는가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병두 : “종교가 빨리 망하는 길은 돈을 주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나라 주요 종교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김근수 :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어떤 스님들은 가톨릭의 교황선거가 총무원장 선거의 좋은 모범사례가 되지 않겠느냐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교황선거는 한계와 약점이 있다.
첫째는 추기경만 투표권을 갖고 있다. 주교, 신부, 수녀, 일반 성도들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천주교 신도를 이룬 여러 그룹의 균형 잡힌 비율을 지키는 선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가톨릭의 교황 선거는 추기경들이 직선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좁은 비율이다. 만일 가톨릭의 교황선거를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 그대로 도입하면 투표권은 종회의원들만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자스님(비구니), 일반 재가 불자들은 한 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종회의원들 사이에 연합, 담합, 세 대결, 야합이 이뤄질 것이다.
총무원장 선거를 하려면 여자스님, 남자 스님, 여자 재가불자, 남자 재가불자가 공평하게 25%씩 표를 갖게 해야 한다. 담합과 협상이 이뤄지지 않게 적어도 네 부류가 합쳐서 만(10,000) 표 이상은 되어야 한다.
가톨릭이 중세에 아주 나쁜 짓을 했는데 특히 교황선거에서, 나쁜 추기경이 나쁜 교황을 뽑아 놓으면 나쁜 교황이 다시 나쁜 추기경을 뽑아서 요직에 등용했다. 그러면 그렇게 뽑힌 나쁜 추기경이 다시 나쁜 교황을 뽑는다. 이런 사례를 조계종이나 불교의 다른 종단에서 배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병두 : 흔히 가톨릭은 좋은 면만 보게 된다. 교황선거 같은 경우 중세 정치권력과도 심각한 제휴나 유착이 많았다. 그런 점은 도저히 따라가면 안 되는 것들이다. 생물학자나 의사들이 이런 말을 한다. “진통 해열제는 급할 때 딱 한번 먹어야 하는데,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진통 해열제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 또한 정부 보조금에 중독증이 생겨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것을 벗어날 수 있도록 여론 형성에 도움을 부탁드린다.
마지막으로 불자들에게, 불교계에 꼭 하고 싶은 말을 부탁드린다.
원익선 : 불교계의 종교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자비와 사랑과 은혜라고 하는 여러 가지 종교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와 일치시키는 노력을 불교계가 했으면 좋겠다.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또 아픔의 근본원인을 진단해서 정의와 불의, 공정과 불공정을 명확히 판별해내고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불교계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개인화된 삶을 넘어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에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상대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더 깊이 이뤄갔으면 좋겠다.
김근수 : ‘부처님 오신 날’에 덕담만 하고 기쁜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만 해도 모자랄 터인데 일반 불자들과 스님들에게 한 말씀 드리겠다. 불자들은 재가 단체를 구성하든 불교를 지지하든, 권승(權僧)들 ‧ 범죄를 저지른 스님(犯戒僧)들을 고발하고 끌어내리는데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또 스님들은 깨달음과 수행이 중요하지만 그것 중단하고 빨리 조계종을 개혁해야 한다. 스님들 때문에 불교가 망하게 생겼다. 스님들은 해야 할 일 하나밖에 없다. 중생들 염려 마시고 본인들 참회나 열심히 하시라.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이찬수 : 애정 어린 비판으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불교계 지도급 스님들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남의 말을 잘 안들을 것 같은’ 이미지다. 특히 재가자의 말은 잘 안 듣고 가르침만 줘야한다는 자의식이 있을 것 같다. 사회의 목소리를 잘 듣고 귀를 많이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기독교에게서 스님들도 꼭 배웠으면 좋은 점이 있다. 기독교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과 함께 불교와 기독교를 주제로 토론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스님 중에도 서양철학 전문가가 될 수도 있고, 정치학 전문가도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세속의 언어를 충분히 소화해 내야, 학력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스님들의 말을 깊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남의 얘기를 듣고 끊임없이, 수행만이 아니라 세속 언어의 진의(眞意), 깊이를 소화하는 스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병두 : 신학을 하신 분들 중에는 불교학 공부를 정통으로 하신 분들이 많다. 그런데 불교 학자들 중에는, 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자를 포함해서, 기독교 신학을 학문적으로라도 공부한 분이 거의 없다. 그 부분에 대한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원음방송에서 생방송으로 주요종교를 대표하는 학자들을 모시고 좌담을 하게 된 것이 더욱 의미가 크다. 이웃종교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받아들여 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도 다른 종교계 매체인 불교방송, 평화방송, 기독교 방송에서도 이런 기회를 자주 만들어서 이 땅에서 종교평화, 나아가 국민화합에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이 글은 <에큐메니안>과 <가톨릭프레스>에도 실렸습니다. ‘레페스 포럼’ 관계자와 해당 매체의 동의를 얻어 <미디어붓다>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