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교문화연구소 2월 종교문화포럼을 ‘조선왕실의 제향’ 및 ‘세종대 흥천사 승역 관련 현황’을 주제로 오는 20일(토) 오후 2시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에서 갖는다.
제1주제는 이욱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가 ‘조선 왕실의 제향 이해 - 정제(正祭)와 속제(俗祭)의 변용-’을 발표하고, 임현수 연구원(한국종교문화연구소)이 논평에 나선다.
이욱 박사는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한 해에 몇 번의 제사를 거행하였을까를 다룬다.
이 박사는 정조대를 기준으로 하면 중앙 정부가 1년에 거행하는 제사의 수는 347건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여기에는 종묘, 사직, 선농단, 선잠단, 우사단, 삼각산, 한강 등 여러 가지 제사가 포함되지만 이 중에서 왕릉, 왕의 초상을 모신 진전, 사친의 궁묘 등에서 지내는 속제(俗祭)가 225건을 차지하였다는 점을 발표할 예정이다. 여기에 종묘까지 포함하면 국가 제사의 대부분이 왕실의 제향이었으며, 왕실 제사는 왜 이렇게 많을까를 구명한다. 그리고 국가의 틀 내에서 왕실의 제사는 어떻게 운영되었을까를 살펴본다.
정동에서 정릉으로 옮겨져 세워진 오늘날 흥천사 전경. 정념스님의 원력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두 번째 주제발표는 민순의 박사(서울대학교)가 ‘세종 11년(1429) 흥천사(興天寺) 수리공사와 승역급첩(僧役給牒)- 도첩제도 변용의 시작과 국가-종교간 권력 착종에 관한 종교학적 고찰의 일례-’를 발표한다. 논평은 이종우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가 나선다.
민순의 박사는 고려시대 이래 승도(僧徒)가 민.관의 각종 영선 및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으나, 조선 초의 승역은 다소 특징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는 점, 태종 17년(1417) 국왕의 명에 의해 청중(請衆) 즉 공권력의 승역 징발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 승역이 재개된 것은 세종 11년(1429) 흥천사 수즙공사의 경우였다는 점을 발표한다. 민 박사는 세종 6년에 별요(別窯)의 경영에 승단의 세력이 대거 투입된 흔적이 보이지만 이는 태종 때 시작된 관행의 계속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뿐만 아니라 별요의 경영은 영선 및 토목공사 등에 동원된 일반적인 승역과는 달리, 일종의 준 관공서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으므로 별도의 경우로 간주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는 점도 언급할 예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 11년 흥천사의 승역 동원에 처음으로 도첩의 대가성 발급이 수반됨으로써 이후 조선시대 승역급첩(僧役給牒)의 포문을 열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것을 먼저 발의 제안한 쪽이 흥천사 즉 교단이었던 것으로 강력히 추정된다는 점을 주장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이는 태종~세종 연간에 진행된 국가권력의 불교교단 정비 특히 도첩승을 중심으로 하는 공인교단 관리정책과 맞물리며, 공인교단 내 승려대중의 관리와 처우를 두고 국가권력과 교단권력이 대위 및 교착하는 양상의 일례이자, 이후 교단권력이 국가권력에 예속되어 가는 역사적 흐름의 큰 분기가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에서 조선시기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관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는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0길 69-1(봉천동)에 소재하고 있다.
문의: 02)886-2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