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의 도사가 되고 사생의 자부가 되는 길을 가는 자는 온 세상의 유정은 물론이고 무정에까지도 육근(六根)의 작용을 자유롭게 해야 하며 스스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불자 개개인이 그러해야 함에 종단의 운영을 책임진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시로 난관에 부닥쳐 어려움을 겪고 자주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출가든, 재가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일러 불자라고, 혹은 불교도라고 칭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대로 다르마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노력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임을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종언론 공동 대책위원회 구성 및 운영계획(안)”이라는 것을 보았다.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육근(六根)[눈(眼根)ㆍ귀(耳根)ㆍ코(鼻根)ㆍ입(舌根)ㆍ몸(身根)ㆍ뜻(意根)]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여 최종적으로는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설파한 것이다. 이것이 불교라는 종교인데, 이 육근을 강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 해괴한 안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설혹 종단의 힘 있는 세력이 어떤 사유로 인해 부득이 제재를 해야만 되겠다고 판단이 드는 대상이 생겼더라도, 그 대상을 종단 차원에서 제재를 가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행위인지, 또 계획하는 방법은 불교적인지 하는 점들에 대해서 조심히 살피고 신중을 기함이 불교종단다운 처신이라 하겠다.
불교사회정책연구소 법응스님.
불교는 삼장(三藏)의 종교로서 이론과 논리의 전개가 진실하고 당위성이 있어야만 한다. 필자는 승려 개개인은 수행의 과정에 있기에 실수와 착오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종단이 하는 일은 지혜가 구족한 완벽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긴다. 종단이 하는 일은 그 대상이 누구라도 금강경의 가르침과 같이 “응생진한(應生嗔恨)” 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2003년 12월 29일 <불교포커스>에 “사부대중은 종정예하를 의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라는 제하의 글을 필두로 교계 언론에 수백 편의 제안과 문제제기의 글들을 기고했다. 종단 권력층에서 수용하기 껄끄러운 내용도 상당부분 있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공개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내용들은 종단에 직접 문건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인류 역사는 비판과 견제 속에서 발전해 왔고 오늘에 이르렀다. 역대 스님들도 공부를 시험하고 시험 당하는 과정 즉, 비판과 긍정의 혼재 속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대자대비를 구현해 왔다. 기실 언론의 기능도 이 범주 안에 든다.
종단의 조치에 당장은 눈치를 보고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다른 이에게 가해진 제재가 언젠가는 내게도 가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압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복원하고자 하는 욕망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 세상 이치다. 반발심리는 항상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용에 의한 역효과는 비례하여 증대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터넷 접속마저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할 말을 잃는다.
우리 종단은 1962년 3월 25일 종헌을 선포(제정22일)한 이래 조직의 체계와 운영의 질서를 확립하고 여법성을 구족하는 등 질적 양적으로 발전을 해 온 반면에 지난 세월동안 쌓여온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종단이 치르고 있는 이 고통과 어려움이 한편으로는 ‘성장통’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성장통을 어떻게 잘 이겨내고 해소하느냐에 따라 집행부의 업적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불교포커스>와 <불교닷컴>이 종단의 강력한 제재 앞에 놓였다. ‘대외비’로 문서분류 등급이 돼 있는 “해종언론 공동 대책위원회 구성 및 운영계획(안)”을 보는 순간 필자는 인도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 떠올라 양 언론사가 ‘불가촉언론(不可觸言論)’이 되었구나, 탄식하고 말았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현관 계단을 오르다 보면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팻말과 마주하게 된다. 엄청난 계획안까지 작성해서 양 언론사에 대응을 한다는 것은 일견 두려움이 그만큼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어이없는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이들에게 더욱 진실한 ‘조고각하’가 필요해 보인다.
法應(불교사회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