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도 물렀거라, 강남 들썩이게 한 청량한 불교철학 바람
“이제 오늘 우리는 불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불타의 깨달음, 즉 법성(法性)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시대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오늘의 불교도들에게 그러한 지각판단의 능력(智慧)이 있는가? 불교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택(簡擇)할만한 ‘지성’이 작동하는가?”
미붓아카데미(대표 이학종)가 기획 진행하는 대하 프로젝트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의 첫 순서인 권오민 교수(경상대 철학과)의 ‘지성과 불교’ 주제의 강좌가 지난 7월 10일 서울 강남 방배동 소재 사찰요리전문점 ‘마지’의 2층 갤러리에서 140명의 청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자리를 가득 메운 채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원효, 원측, 의상 이후 사실상 지성불교의 흐름이 멈춰졌던 한국불교사에서 지성의 흐름을 회복해 정혜(定慧)의 조화로운 양립이 가능하도록 모멘텀을 제공한다는 취지 아래 서양철학의 프리즘으로 불교와 불교철학을 조명해보는 대하 기획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에 대한 교계 안팎의 관심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개강 첫 강좌인 권오민 교수의 '불교와 지성' 강좌에 정원의 두 배에 이르는 140여 명의 대중들이 운집했다.
아비달마 불교 최고 권위자의 대중강연에 불교·철학계 관심 폭발
80명 수용 가능한 방배동 마지 갤러리에는 두 배에 가까운 140여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서서 강연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려들면서 강좌에 참석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은 수준의 대하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나타난 동참 열기는 이전의 불교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아비달마 불교 연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좀처럼 대중강연에 나서지 않았던 권오민 교수도 운집한 청중들의 열기에 취한 듯 80분 동안 열강을 이어갔다. 한국불교에서 지성의 흐름이 끊기거나 미약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지성의 회복만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음을 역설해온 권 교수는 개강 강연에서 이 같은 자신의 소신을 유감없이 펼쳤다.
“역동성을 상실한 채, 지난날의 영광에 의탁한 채, 다만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지한 채 주어진 불교를 주어진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초기불교가 친설(親說)/원음(原音)이라느니, 간화선만이 구경도(究竟道)라 외치면서….”
권 교수는 이날 간화선 일변도, 선정 일변도, 지성이 아닌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신행에 치중해온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강하게 비판했다. 권 교수는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오직 ‘혜(慧)’임을 역설했다. 불교의 모든 경전이나 가르침들이 이를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불교에서는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지성불교의 흐름이 외면되어 왔다고 일갈했다.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 강죄에 참석한 대중들의 공부 열기. 장소가 협소해 서서 듣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한국의 불교도, 수신행자 아닌 수법행자의 길 걸어야
“초기불교 시대 수법행자(隨法行者)조차 불법의 의미나 진위에 대해 사량(思量)·관찰(觀察)·간택(簡擇)하였다. 그들은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으로 불법(佛法)을 이해하려고 하였다”고 전제한 권 교수는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불교를 어떻게 사량·관찰·간택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는 ‘다만 믿음으로써 주어진 가르침에 따르는’ 소극적 수동적 경향의 수신행(隨信行)이 아니라, ‘이치에 따라 가르침을 판단하는’ 적극적 능동적 경향의 수법행이 오늘의 한국 불교도가 걸어가야 할 길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권 교수는 선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국불교의 수행전통에 대해서는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의 정점은 혜(慧)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했다. 선정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선정은 어디까지나 혜를 드러내는 과정적 단계이며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는 무엇인가? 불교는 ‘있어라’하니 있었다고 믿는 종교가 아니며, ‘행하라’해서 행해야 하는 종교도 아니다”라고 강조한 권 교수는 그 이유를 ‘불교는 지혜의 종교, 지성의 철학이기 때문’이며, 지혜란 간택, 즉 비판적 탐구, 분별적 이해를 본질로 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권 교수는 “미래의 불교는, 과거의 전통이나 문화가 아닌 오늘 현재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의 불교는 지성의 철학, 지혜의 불교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오는 7월 17일 오후 7시에는 미붓아카데미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 두 번째 강좌 황설중 교수(대전대)의 ‘회의주의와 불교’가, 7월 24일 오후 7시에는 세 번째 강좌 김성철 교수(동국대 경주캠)의 ‘중관논리와 역설’이 각각 진행된다.
좌장 미산스님과 미붓아카데미 교장 금강스님도 자리를 함께 해 참석대중을 격려했다.
미붓아카데미 강좌에 동참한 회원들에게 제공되는 '마지'의 정통 사찰요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