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 스님, 도서출판 도반

216쪽, 1만2000원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因]과 조건[緣]하에서 법칙에 따라 생겨난다. 그 법칙이 연기법(緣起法)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인과법에 대해 여러 이론들이 있었다. 연기법은 부처님이 설한 인과법, 또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인과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연기법이 자신이나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우주(법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 법칙, 즉 우주적인 법칙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은 단지 이 우주적인 법칙을 완전히 깨달은[等正覺] 후에 그것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12연기설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경(緣起經)』은 한 권으로 이루어진 짧은 경전이다.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칙을 밝혀, 중생이 번뇌와 고통에서 해탈하도록 길을 열어놓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경은 먼저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연기법(緣起法)의 시작과 대의(大義)를 밝혔다. 이어서 우리의 괴로움의 원인을 연기법에 의해 12연기(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로 설명하고, 다시 12연기 각각에 대해서 부처님이 직접 설명한 구조로 되어 있다.

『연기경(緣起經)』의 한역(漢譯)은 당나라 때 현장(玄奘) 스님(600~664)이 맡았다. 삼장법사 현장 스님은 29세 때 혼자 서역으로 구법여행을 떠난 뒤 16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와 『대반야경』을 비롯한 75부 1335권의 경전을 번역한 대 역경승이었다.

현장 한역본을 저본으로 해 쌍계사승가대학 중강 도정 스님이 우리말 번역과 해설을 담은 『연기경』(도서출판 도반)을 펴냈다. 우리말 단행본으로는 처음이다. 스님은 “연기법은 불교 공부의 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면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연기법을 깨우친 것이며, 소승·대승을 막론하고 불교 교리 전체가 연기법으로 압축된다.”고 설명했다.

도정 스님은 대승불교의 사상적 토대를 세운 용수 보살이 『중론』을 지으면서 첫머리에 연기법을 찬탄한 것을 예로 들었다.

不生亦不滅(불생역불멸) 不常亦不斷(불상역부단)

不一亦不異(불일역불이) 不來亦不出(불래역불출)

能說是因緣(능설시인연) 善滅諸戱論(선멸제희론)

我稽首禮佛(아계수례불) 諸說中第一(제설중제일)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역시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네.

늘 항상한 것도 아니며, 역시 끊어지는 것도 아니라네.

한결같은 것도 아니며, 역시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네.

오는 것도 아니며, 역시 가는 것도 아니라네.

이것은 인연법으로라야 능히 설명이 되나니

모든 희론을 잘 없앤다네.

내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예경하나니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 첫째가 되기 때문이라네.(203쪽)

도정 스님은 경전을 번역하면서 부처님이 참 친절하신 분이라는 점을 다시 느끼게 됐다.

“부처님은 한마디 던지고 알아서 이해하라고 하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경전이 그렇듯이 처음에 결론을 분명하게 말하고, 그리고 조금 더 풀어서 말하고, 그리고는 또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말씀하십니다. 『연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님은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망이겠으나, 그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복은 아닌 것 같다.”면서 이 책이 인연이 되어 많은 이들이 깨달음의 큰 복을 만나게 되기를 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