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감행한 것은 생명 있는 것들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불교에서는 이 고통을 생로병사의 고통(4苦)과 구하는 것을 구할 수 없는 고통(求不得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일상의 삶속에서 번뇌망상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고통(五陰盛苦) 등 4가지를 더해 팔고(八苦)로 세분해 이야기 한다.
이 4고8고(四苦八苦)로 대표되는 고통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즉 위대한 포기를 이끌어낸 원인이며, 동시에 불교의 출발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는 작은 미물들의 고통을 허투루 보지 않으셨다. 삶속에서 늘 맞닥뜨리는 슬픔과 부조리, 변화 등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셨다. 부처님의 이런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 동안 쌓아올린 덕행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장된 권력과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 나선 부처님의 위대한 여정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부처님은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락을 성취하시고는 곧바로 수많은 중생들을 찾아다니며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가르침을 전했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겠다는 부처님의 탄생선언에서 보듯이 불교에서 고통의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체계화한 사성제에서는 고통을 진리의 단계로까지 승화시킨다. 고통의 진리, 즉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苦聖諦)가 그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설법을 듣는 대상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지만,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나아가 뭇 생명들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문제를 언제나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동서고금 어느 성인께서도 부처님처럼 고통의 문제에 대해 깊게 천착하신 분은 없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 고는 진리의 출발이자 희망으로 가는 노둣돌인 셈이다.
최근 진모영 감독의 처녀작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90대 후반의 할아버지와 80대 후반의 할머니가 주인공인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는 두 노부부와 이들이 기르는 개 두 마리가 전부다. 물론 잠깐 등장하는 가족이나 동네사람들도 있지만, 두 노인의 알콩달콩 사랑이야기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영화의 내용에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음향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종 조용한 배경음악과 함께 잔잔하게 스토리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금실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너무나 ‘귀엽고’ ‘순박한’ 삶의 장면이 눈길을 붙잡아매고, 이어 열 살 남짓 많은 할아버지가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는 할머니의 간절한 사랑이 가슴을 후비고, 영화 전 후반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묘 앞에서의 할머니 울음소리는 대금이 아닌 피리소리의 버전으로 폐부를 찌른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숨을 멎거나 몰아쉰다. 블록버스터의 요란한 음향이나 시선을 붇잡는 기상천외의 CG는 찾아볼 수 없지만, 지극히 평범한 스토리가 이렇게 큰 울림으로, 환희심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일찍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에 대해 이 영화처럼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법문을 듣거나 본 적이 없다. 병들어 죽어가는 고통의 과정을 리얼하게 담아낸 영상은 그대로가 감로법문이다. 애별리의 고통을 구슬픈 피리소리 같은 통곡으로 삭이는 할머니의 처연한 표정 속에서 ‘잘 산다는 것은 정녕 어떤 것인지’를 자문하게 된다.
예서 영화의 줄거리나, 장면을 소개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동의 울림이 천둥소리보다 더 컸다는 것만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한 해가 저무는 이 스산한 시절에, 사문유관(四門遊觀)의 가르침을 실감나게 일깨워주는 이 영화를 꼭 감상하시기 바란다. 독실한 불자감독이기도 한 진모영 감독(오른쪽 사진)과 그의 아내 다솔 보살의 배려로 비아이피 시사회에 참석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함께했던 분들에게 던진 기자의 소감 한 마디 소개하는 것으로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감상기를 마친다.
“오늘 저녁 위대한 선지식의 더 없이 감동적인 법문을 한 편 들었습니다.”